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2집. 일년이면 삼백예순 날을  


  "2집. 일년이면 삼백예순 날을"
시기적으로는 1집 보다 빠른
1992년 3월3일에 처음으로 인쇄되었는데
교정본 상태로 한동안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2집으로 보시면 됩니다.

훗날 증인출판사에 의해서 재출판되었으며
'내 마음의 의자 위에 살며시 다가앉은
당신을 위한 사랑의 노래'라는
긴 부제를 갖고 있습니다.

'믿음'을 序詩로 하였으며
총 10개의 章에 5편씩,
각 章마다의 내용 순서로는
'사랑하는 이의 밀어', '여러 각도의 밤의 얼굴',
'생활 속의 동심 향기', '변화를 추구하는 일상',
'자학으로 성숙하는 영혼'으로 편집하여
총 51편의 詩로 엮어져 있으며
추가로 8편의 꽁트모음,
그리고 단편소설 '해바라기의 겨울 계곡'을
뒷부분에 같이 실었습니다.

분량 상으로는 많지 않지만
그 구성된 내용 상으로는
종합 쟝르의 選集 성격을 띄고 있는
詩集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증인 출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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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새 *



시작노트

" 밤새 " 詩作 note

참 오래된 시다. ‘림삼 제 2시집’인 ‘일년이면 삼백예순 날을’에 수록되어 있는 시이니 물경 서른 살은 됨직하게 나이를 먹은 시다.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가 펼쳐든 추억록에서 오랜만에 찾아내곤 무척이나 반가웠다. 필자가 적은 시이지만 다소 낯선 느낌인데, 그래도 간결하면서도 할 말은 다 한 듯 해서 속이 후련하다. 춘분을 막 지난 봄의 한 가운데, 계절과는 어울리지 않는 소재라 다소 생뚱맞긴 해도, 어쩐지 지금 처해있는 우리네 시국과, 헤매는 처지와 흡사한 분위기라서, 묘한 동질감과 현실감을 공유하는 기분 들어 슬그머니 애착이 간다.

봄 소식보다 먼저 찾아와서는 전 국민의 심사에 홧불을 지피고, 흡혈귀처럼 늘어붙은 이 지긋지긋한 코로나의 망령, 다소 진정되는가 했더니 급기야 변종을 만들어내면서 전 세계적으로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는 시점, 오도 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그저 나약해빠진, 인간이라는 명찰 가슴에 달고 있자니 그 자괴감이 하늘을 찌른다.

이 와중에도 제 철 만난 철새들이 떼거리로 몰려다니면서 오로지 자신들 아니면 나라를 살릴 사람이 없다는 구국의 일념이라며, 내일 없는 사생결단, 이전투구에 혈안이 되어있는 가소로운 작태는 꼴 사납기 그지없고, 지구촌의 안전과 평화에는 관심도 없이 오직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지금도 올림픽 개최를 고집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이웃 나라의 망상도 한심하기는 매양 한 가지라, 한숨만 나올 뿐이다.

눈 들어 살펴보건대, 분명 온 누리는 봄인데. 대자연의 색깔은 연록색으로 치장된 지 하마 여러 날 되었는데, 어찌 이 마음에는 봄이 오지 않고 겨울의 잔재를 가슴 가득 끌어안은 채 놓지를 못하는 겐지, 그리고 어둠 가득한 밤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헤매는 겐지, 이 노릇을 어떡해야 좋단 말인가? 우리의 선조들이, 먼저 가신 선열들이 얼마나 힘겹게 쌓아 올린 역사이며, 어떤 피눈물을 터전 삼아 이룩한 번영인데, 지금 와서 이 후안무치한 후손들이 이 나라를, 이 고귀한 조국의 넋을 송두리 째 말아먹으려 드는 겐지, 도무지 얼굴을 들 수가 없음이다.

그래도 어쩌랴? 이 땅에서 이 하늘 올려보며 숨을 쉬어야 하는 생명체로서, 작고 보잘 것 없는 힘이나마, 미미하기 짝이 없는 성의이나마, 그저 먼지같은 노력이나마 기울여 단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만 있다면야 이 몸 스러지는 것 따위 대수랴? 그런 마음가짐으로 오늘 아침을 시작한다. 무슨 거창한 투사도 아니요, 나라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도 아닌, 힘 없는 글쟁이에 불과하지만 혹시 필자의 힘이 필요해, 어디선가, 누군가가 불러만 준다면 한 걸음에 달려가 힘을 보태리라. 그런 다짐으로 이 아침 햇살을 마주한다.

그렇게 희망을, 언젠가는 이 험난한 고통의 나날들이 지나가고 필경 새로움 꿈과 소망을 한 아름 간직한 내일이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견디면 되는 거니까 말이다. 런던의 길 한 모퉁이에서 구두를 닦는 소년이 있었다. 빚 때문에 감옥에 갇힌 아버지를 대신하여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야 했던 것이다. 소년은 매일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행인들의 구두를 닦았는데, 한 번도 인상을 찌푸리는 일이 없었다. 늘 노래를 흥얼거리며 밝게 웃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소년에게 물었다.

“구두 닦는 일이 뭐가 그렇게 좋으니?” 그 때마다 소년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당연히 즐겁지요. 지금 저는 구두를 닦는 게 아니라 희망을 닦고 있거든요.” 이 소년이 바로 ‘올리버 트위스트’를 쓴 세계적인 천재작가 ‘찰스 디킨스’이다. 소년 찰스는 일반 사람들 눈에 불쌍해 보일 수 밖에 없는, 시쳇말로 ‘불우 소년’이었다. 그런 그가 삶을 비관하지 않고 오히려 콧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희망이었다.

희망은 절망을 몰아낸다. 절망감이 엄습할 때 절망을 상대로 씨름을 해가지고는 결코 절망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절망이 밀려올 때 절망을 보지 않고 희망을 붙들면 절망은 발 붙일 틈이 없게 된다.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를 ‘대체의 법칙’으로 해명할 수 있다. 심리학에 기초를 둔 이 원리는 말하자면 이렇다. 사람의 뇌는 동시에 두 가지 반대 감정을 가질 수 없다. 곧 사람의 머리에는 오직 한 의자만 놓여 있어서 여기에 절망이 먼저 앉아버리면 희망이 함께 앉을 수 없고, 반대로 희망이 먼저 앉아버리면 절망이 함께 앉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꾸 희망을 가지도록 해보자. 이루어지든지 말든지 계속 좋은 것을 상상하자. 그러면 된다. 연달아 희망을 품는 것이 절망을 몰아내는 상책인 것이다. 한 번 품었던 희망이, 시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도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다시 희망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언젠가는 반드시 그 희망이 현실이 되어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날들을 선물로 줄 것이다. 그런 희망을 품고 살아가자. 그것이 희망이다.

희망의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만남이다. 독일의 문학자 ‘한스 카롯사’는 “인생은 너와 나의 만남이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만남의 존재다. 산다는 것은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이다. 부모와의 만남, 스승과의 만남, 친구와의 만남, 일과의 만남, 좋은 책과의 만남, 많은 사람과의 만남이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만남을 통해서 결정된다. 여자는 좋은 남편을 만나야 행복하고, 남자는 좋은 아내를 만나야 행복하다.

학생은 훌륭한 스승을 만나야 실력이 생기고, 스승은 뛰어난 제자를 만나야 가르치는 보람을 누리게 된다. 자식은 부모를 잘 만나야 하고, 부모는 자식을 잘 만나야 한다. 씨앗은 땅을 잘 만나야 하고, 땅은 씨앗을 잘 만나야 한다. 백성은 왕을 잘 만나야 하고, 왕은 백성을 잘 만나야 훌륭한 인물이 된다. 인생에서 만남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우연한 만남이든, 섭리적 만남이든, 만남은 중요하다. 어느 누군가와 오늘도 만남은 이루어진다. 그 만남을 통해서 불행이 아닌 행복으로 이어지는 시간을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수많은 이 만남들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대처하느냐에 따라 만남의 의미와 성격이 결정되어진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것들을 나누고, 상대의 모든 장단점들을 배우고 익혀 새롭게 거듭남의 계기로 삼으며, 그렇게 형성된 자아로 다시 만남의 진실을 간직하려 하는 삶의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가 잘 아는 세계적인 부호 ‘록펠러’는 33세에 백만 장자가 되었고, 43세에 미국의 최대 부자가 되었고, 53세에는 세계 최고의 갑부가 되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55세에 그는 불치병으로 1년 이상 살지 못한다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최후 검진을 위해 휠체어를 타고 갈 때, 병원 로비에 실린 액자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그 글을 보는 순간 마음 속에 전율이 생기고 눈물이 났다. 선한 기운이 온 몸을 감싸는 가운데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겼다. ‘평생 앞 만 보고 달려온 고단한 인생, 성실하고 선하게 살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중에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을 슬프게 하고 핍박을 한 적은 없었을까?’ 반성하게 되었다.

조금 후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을 차리게 되었는데 입원비 문제로 다투는 소리였다. 병원 측은 병원비가 없어 입원이 안 된다고 하고, 환자 어머니는 입원시켜 달라고 울면서 사정을 하고 있었다. 록펠러는 곧 비서를 시켜 병원비를 지불하고, 누가 지불했는지는 모르게 했다. 얼마 후 은밀히 도운 소녀가 기적적으로 회복이 되자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록펠러는 얼마나 기뻤던지, 나중에 자서전에서 그는 그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다.

“저는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 때 그는 나눔의 삶을 작정한다. 그와 동시에 신기하게 그의 병도 사라졌다. 그 뒤 그는 98세까지 살며 선한 일에 힘썼다. 나중에 그는 회고한다. “인생 전반기 55년은 쫓기며 살았지만, 후반기 43년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물론 어떤 결과가 반드시 일정한 원인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그러나 행복과 나눔의 관계는 어쩌면 떼어놓을 수 없는 인과의 법칙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진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살아간다. 그래서 내일의 행복을 희망하지 않는 삶은 존재할 수조차 없다.

그러면서도 행복하기 위해서라면, 우리가 살면서 만나게 되는 많은 인연 중에 선택과 포기를 잘 구분할 줄도 알아야 한다.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여인의 미모에 뭇 남성들의 마음이 흔들렸다. 이윽고 용기 있는 세 명의 남자가 여인에게 청혼을 했다. 한 명은 이웃 나라 왕자였고, 또 한 명은 용맹한 기사, 그리고 또 한 명은 부유한 장사꾼이었다. 여인은 누구를 선택해야 할 지 고민스러웠다. 세 명 모두 놓치기 아까운 남자였다. 고민은 몇 날 며칠 계속되었고 급기야 한 달을 넘어 두 달로 이어졌다. 그 고민의 결론은 나지 않았다.

결국, 기다림에 지친 세 명의 남자는 여인을 떠났다. 세 명의 남자가 떠난 사실을 안 여인은 그제야 땅을 치고 후회했다. 후회는 곧 병이 되었고, 불운하게도 여인은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다. 훗날, 여인의 무덤에서 꽃 한 송이가 피었는데 그게 바로 ‘튤립’이었다. 이 여인이 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을까? 바로 포기하는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를 얻으면 다른 것들은 놓을 줄 알아야 하는데, 모두 다 탐을 냈던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가 ‘장 폴 사르트르’는 “인생이란 탄생과 죽음 사이의 선택”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선택해야 할 순간이 온다. 현명한 선택이란 하나를 위해 다른 것을 놓아줄 수 있는 마음이다. 포기하고 내려놓는 것이 곧 얻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한 어떤 것을 포기하는 일이 곧 다른 것을 획득하는 일이라는 사실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적절한 선택과 포기야 말로 삶을 값지게 만드는 필수 요소 중의 하나이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한 남자가 의사를 찾아갔다. 그는 의사에게서 이런 진단을 받았다. “당신의 기억을 되살리려면 당신의 시력이 손상될 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방법이 없습니다. 선택은 당신이 하십시오. 기억을 되찾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두 눈이 멀쩡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는 심사숙고한 후 대답했다. “저는 기억을 되살리기보다는 제 시력을 그대로 유지하겠습니다. 제가 과거에 어디에 있었느냐를 보기보다는 앞으로 어디로 가게 되는지를 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일을 바로잡을 수 없다. 그러나 과거의 문은 이미 닫혀 있지만 미래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열려 있다. 과거의 실패나 성공에 계속 얽매여 있다면 앞으로도 의미 있는 삶을 살 수는 없다. 우리가 삶을 살면서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있는데, 바로 과거에 지배받지 않으면서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몇 번 노력하다 실패한 후에는 다시 시도하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그들은 과거의 기억 때문에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눈이 멀어 있다.

누구라고,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과거는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늘 우리를 따라다닌다. 기억에는 좋은 기억도 있지만
나쁜 기억도 있다. 과거라는 이름의 흘러간 시간은 잡을 수도 되돌릴 수도 없다. 반면, 지금 이 순간은 ‘.부터’라는 이름의 미래를 향한 시작이다. 과거가 풍요로웠다고 ‘..부터’가 나태하다면, 과거가 괴롭고 아팠다고 ‘..부터’에서 시작도 아니하고 좌절한다면, 우리는 손으로 잡을 수 있는 행복을, 그리고 보물을 놓치게 된다.

바라보면 잡을 수 있는 것을 고개를 떨구어 보지 못하고, 잡을 기회조차도 얻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내 생의 어드메 쯤에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불운을, 무겁게 짊어지고 사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지금도 시간은 흘러가고 있다. 끝없는 과거가 양산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이 시간, 퍽이나 소중하게 느껴진다. 한 시라도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되겠다. 촌음이라도 아끼며 잘 살아가야겠다. 잘 살아내야겠다.

참으로 두려운 게 시간이다. 지금 이 시간도 시간은 쉼 없이 흘러가고 있다. 시간은 매사에 멈추는 법도, 또 더디게 흘러가는 법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시간을 저축하거나 남에게 빌릴 수도 없다. 또 그렇다고 해서 시간이 우리에게 무한정 베풀어지는 것도 아니다. 길어야 고작 100년의 삶을 우리 인간들은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주어진 자기 생 중에서 얼마 만큼의 시간을 보냈을까? 남아 있는 시간은 또 얼마나 되는 것일까?

새벽이 되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게 태양이지만, 우리 인간의 시간은 무한정 기약되어 있는 게 아닌, 한시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의미로 볼 때, 시간은 바로 우리의 생명이다. 그 귀한 생명을 우리는 어디에 쓰고 있는 걸까? 흔해 빠진 돌처럼 헛되이 버리고 있는 건 아니어야 할 것이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볼 때가 있다. 이 지구상에 발 딛고 살아가는 사람, 그 중 그 어느 누구도 나와 무관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말이다.

한 시대에 태어나 같이 살아간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인연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이런 생각을 할 때면 필자는 주위 사람들을 너무 소홀히 대하지는 않았나 반성하게 된다. 아주 커다란 인연의 끈으로 만난 사람을 소중히 여기지 못한 내 못남을 스스로 꾸짖는 것이다. ‘빌 오히언’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에 참으로 많은 에너지를 얻는다. 특히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마다 많은 에너지를 얻게 된다. 또한 거기서 받은 에너지의 일부를 다른 누군가에게 제공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서로 어깨를 기대고 체온을 나누며 살아야 하는 존재인가 보다. 사람의 손이 따스한 체온을 나누며 서로 깍지를 끼고 살아가라고 다섯 손가락으로 이루어져 있듯이 말이다. 그리스 신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신이 인간들은 어떤 기도를 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바구니를 가진 두 천사를 땅으로 내려 보냈다. 한 천사는 바구니에 인간들의 소원을 비는 기도를 가득 채우라는 명을 받았고, 다른 한 천사는 인간들이 감사를 올리는 기도를 가득 채우라는 명을 받았다.

얼마 후 두 천사는 신의 나라로 되돌아왔다. 한 천사는 기쁜 얼굴로 소원을 비는 기도의 바구니를 꽉꽉 채워 왔지만, 다른 한 천사는 슬프고 무거운 얼굴로 돌아왔다. 감사하는 기도의 바구니에는 아무것도 채우지 못한 채.... 행복해지느냐 불행해지느냐, 그것은 바로 자신이 행복하다고 마음먹느냐, 불행하다고 마음먹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아닐까? 바닷가를 거닐다가 진주를 하나 발견하게 되었을 때는 이렇게 말하도록 하자.

“여긴 모래밭이 아니야. 진주밭이라구!” 진주는 단 한 알에 불과하고 모래는 가득 쌓인 곳일지라도, 모래밭을 진주밭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란 사실을 잊지 말자. 행복하고 만족스런 삶에는 이유가 없다. 무엇 때문에 행복한 것은 절대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늘 감사하며 살아가는 삶일 수 있다. 마음의 분노 속에서도 작은 사랑의 씨앗을 발견하는 지혜, 싸움과 질투 속에서도 작은 정을 깨닫는 여유로움, 고통과 슬픔과 이별과 눈물 속에도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쓰레기가 썩어가는 악취 속에서도 향기로울 수 있는 아름다움의 비법은 숨어 있다.

이유 없이 행복하고 유괘한 삶. 그런 삶을 누리길 바란다. 무엇을 마음에 담느냐 하는 것은, 그 어느 누구의 책임도 아니고 오직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불만, 시기, 불평, 탐욕 등 좋지 않은 것들을 마음 안에 가득 담아두면 오물통이 될 것이고, 감사, 사랑, 겸손, 양보 등 좋은 것들을 담아두면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사람이 될 것이다. 좋은 사람과 함께 마주 보고 있는 것 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좋은 사람으로 거듭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과 함께 하는 하룻길을 소망하면서, 밤새 소리가 처량한 울음 소리로 들리기 보다는 희망의 노래 소리로 들려지기를 간절히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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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어온다
목메어 우는 밤새 소리
바람 되어 온다
한 번 날갯짓에
설운 사연 바람 되고,
또 한 번 깃을 털면
임 그린 맘 흩어져 오르는데

낙엽 지고 밤이 지면
사랑 또한 질 터인즉
가슴에 심어놓은
임의 손길 따라갈세라,
어느 곳 어디에나 머물지 못해
북풍 찬 바람으로
울다 울다 지친 새

바람 소리 멎어지고
뒷산 걸린 달도 삭아
시름 걱정 그냥 둔 채
먼 동 트건만,
밤 새는 것 애탄 연유
피 맺히게 운다
밤새가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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