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네번째 가상詩集입니다.

2012년 봄부터 씌여진 詩들입니다.
實驗詩적인 성격의 習作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오늘까지 계속 이어져오는 역사의 章입니다.

처음 詩人의 길에 入門한 이래로
이제껏 40년 이상을 지어온 詩이지만 아직도
정확한 詩의 정의를 내리지 못한 채,

판도라의 상자를 가슴에 품어안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풍운아로 떠돌며
詩의 본질을 찾아 헤매고 있는
詩人 林森의 애환이 드러나 있습니다.

林森의 고행은 그래서
지금도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그의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쭈욱 ~~

詩人의 멍에를 天刑으로 걸머지고 있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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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고 싶어 - *



시작노트

" 보고 싶어 - " 詩作 note

보통 봄에 어울리는 시는, 그리고 봄노래는, 새롭게 솟아나는 소망과 따스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가을 하면 웬지 쓸쓸하고, 조금은 서늘한 감상과 고독, 또한 이별과 아픔에 어울리는 노래와 시 등을 떠올리게 된다. 그렇다면 봄에는 이별이 없고, 아픈 상처는 아예 생겨나지 않는다던가? 가을에는 온통 슬프고 힘겨운 일들만 일어나서 우리들에게 눈물과 한숨만 줄줄이 뿌려준다는 말이던가?

봄에도 가슴 저리는 이별이 있고, 세상의 차가운 인심과 메마른 온정 때문에 시린 몸과 마음을 억지로 달래는 사람들이 있고, 가을이라도 우리의 곁으로는 마냥 훈훈한 온기를 전해주는 미담을 전해들을 수 있다. 예컨대 인지상정이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우리가 스스로 만든 계절이 산다. 우리의 속내가 봄이면 그건 봄이다. 우리가 가을을 살고 있다면 사시사철 가을이다. 보고 싶은 사람이, 그리운 사람이, 간절하게 바라는 해후가 있다면, 그 마음은 늘 기다림이고, 오늘이 힘겨움에도 밝은 내일을 간절히 염원하고 있다면 그 마음은 곧 꿈이다.

예전에 ‘시인들이 뽑은 아름다운 노래말’로 7곡이 선정된 적이 있었다. 그 중에 ‘자우림’ 출신의 가수 ‘김윤아’가 부른 ‘봄날은 간다’라는 가요가 있다. “눈을 감으면 문득 그리운 날의 기억 / 아직까지도 마음이 저려 오는 건 / 그건 아마 사람도 피고 지는 꽃처럼 / 아름다워서 슬프기 때문일 거야 아마도 // 봄날은 가네 무심히도 꽃잎은 지네 바람에 / 머물 수 없던 아름다운 사람들 // 가만히 눈감으면 잡힐 것 같은 / 아련히 마음 아픈 추억 같은 것들 // 봄은 또 오고 꽃은 피고 또 지고 피고 / 아름다워서 너무나 슬픈 이야기” 가요의 가사 중 일부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생각만으로도 순식간에 눈물나게 하는 걸, 가만히 속으로 읊조리는 것만으로도 이리도 충분히 가슴 저린 걸.

내친 김에, 이 노래를 OST로 사용했던 동명의 영화 ‘봄날은 간다’를 문득 기억해본다. ‘유지태’ 와 ‘이영애’가 주연으로 출연한 로맨스 영화로 개봉 당시이던 2001년, 많은 청춘들의 호평을 받았던 영화다. 그러다가 ‘썸’이라고 하는 단어가 센세이션을 일으키던 2014년 다시 리메이크되면서 큰 바람을 불러왔었다, ‘썸’은 확실히 그 시절 가장 뜨겁게 달아오른 유행어다. 10대는 물론, 20~30대에서 퍼져나가더니 나중에는 중장년층까지도 ‘썸탄다’라는 말의 의미를 가늠하고, 공유하면서 인기를 체감하게 되었었다.

‘썸’의 어원은 ‘정확하지 않은 어떤 것’과 ‘중요한 것’이라는 뜻을 동시에 가진 영어 ‘썸씽(Something)’이다. 그리고 21세기 한반도의 포털사이트 국어사전에는 ‘관심 가는 이성과 잘 돼가는 감정’이라고 ‘썸’을 정의내린다. 국어사전보다 더 정확히 이 단어의 분위기를 설명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노래 가사다. 바로 ‘정기고’와 ‘소유’의 ‘썸’에 등장한 ‘니꺼인 듯 니꺼 아닌 니꺼 같은 너,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너’가 바로 그 것이다.

정리하자면 무슨 사이인 것인지 헷갈린다는 연애의 전초전, 혹은 연애에 이르기엔 애매모호한 모든 불확실한 관계들에 대한 정의다. 그러니 ‘썸’은 갑자기 등장한 관계가 아니라 인간사의 케미스트리가 흐르기 시작하며 생긴 모든 흐릿한 감정에 마침내 부여된 선명한 이름인 셈이다. ‘모호하나 긴장감 있는, 불확실하나 짜릿한’ 재미난 미덕을 가진 썸은 그렇게 존재가치를 인정받으며 결국은 대중매체로까지 진출한다. TV, 가요, 영화 등은 ‘썸’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소비하며 시대의 유행을 부추겼다.

사실, 영화는 ‘썸남썸녀’들의 산물이다. 로맨스 영화는 물론이거니와, 액션과 스릴러와 같은 타 장르에도 ‘썸남썸녀’들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영화를 통해 연애를 배울 수 있는 이유다. 스크린 속 ‘썸남썸녀’들이 건네는 ‘썸타기’의 교훈은 모든 젊은이들의 로망이며 지표였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봄날은 간다’에서 나오는 이영애의 대사 “라면 먹고 갈래요?”야 말로 단연 압권이었다. 세상엔 수 천 가지 종류의 ‘작업용 멘트’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라면 먹고 갈래요?”가 여전히 희대의 유혹 멘트인 이유는 행간에 숨겨진 썸녀의 에로틱한 사상 때문이다. 그러니까 “라면 먹고 갈래요?”는 “라면 먹은 후 ( )하고 갈래요?”로 읽어야 정확한 본디의 뜻을 가늠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괄호 안에 들어갈 단어는 상상에 맡기겠다. 어쨌거나 커피도 아니고 스프도 아니고 과일도 아닌, 라면이라는 친서민적인 음식을 통해 남자의 긴장을 가볍게 떡 주무르는 주인공의 ‘썸’타는 실력은 실로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를 통해 배우는 ‘썸’의 교훈은, “대화 시에 단어선택에 고심하자.”이다. 단어 하나로 상대방과의 긴장의 끈을 헐겁게 늦출 수도, 땐땐하게 조일 수도 있다. 라면과 같은 유니크한 단어일수록 ‘썸’의 지수는 올라간다.

“라면 먹고 갈래요?”의 패러디형 응용 편도 한동안 히트를 쳤다. 생활밀착형 버전으로 “아이폰 충전하고 갈래요?”, 식신 버전으로 “치즈 넣은 라면 먹고 갈래요?”, 본능충실형 버전으로 “화장실에서 똥 누고 갈래요?” 등의 유머가 회자되기도 했다. 한편, 유지태의 대사 중에서도 유명한 말이 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이 말은 뒤에 정말 많은 상황극의 단골 멘트나 개그프로의 주요 이슈로도 이용된다. 또한 할머니 역의 ‘백성희’의 대사 “힘들지? 버스하고 여자는 떠나면 잡는 게 아니란다.”도 역시 많은 반향을 불러왔던 대사다.

영화 속에서,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는 남자는 묻는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냐고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안다. 사랑이 변할 수 있음을. 사랑이 대부분 영원하지 못하기에, ‘영원한 사랑’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렇게 변덕스럽게 변하고 마는 사랑일지라도 우리에겐 소중하다는 것을 말이다. 마치 짧게 피고 지는 봄꽃처럼. 곧 시들어버릴 것임을 모르진 않지만, 우리는 그 봄꽃 만개하는 봄날을, 비록 짧더라도 충만하게 만끽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라면은 주인공의 사랑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대상이다. 정확히는 영화 속의 주인공 남성을 대하는 여성의 사랑법이다. 사랑이 짊어져야 하는 모든 책임으로부터 도피하고서, 자신의 허기짐(=외로움)만을 인스턴트식으로 해소한다. 그런 감정을 알아챈 남자가 자신을 라면으로 취급하지 말라고 화를 낸다. 모두의 사랑이 다 한결 같으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사람마다 또 그 둘 사이의 관계마다 사랑은 속도도 온도도 방식도 다 제각각이다.

그 차이만큼 사랑은 빨리 이별을 향해 소모되기 마련이고, 여성의 이기적인 사랑을 무작정 잘못된 것이라 비난하기도 애매하다. 지금 그녀가 취하는 사랑법도 결국은 그 전에 지나온 누군가와의 사랑이 남긴 결과물이니까. 변해버린 사랑을 경험한 이에게 영원한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니까 말이다. 아무튼 이런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영화나 가요 등의 문화매체가 실제 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무의식 중에 그 분위기에 편승하여 자연스러운 동화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닮아가는 형상에 문득 당황을 하기도 한다. 허기사 그렇게 쉽사리 일체화가 될 수 있어야 거부감이 없이 문화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삶에 깊이 개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봄이라는 피상적인 현상을 절묘하게 녹아들게 한 이 로맨스 영화는, 이 봄에 추천하는 절절한 사연의 이야기이며 노래다. 결코 한 쪽의 감성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담고 있는 우리들의 사연이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 보라 /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 스스로 사랑이 되어 /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이 시는 ‘정호승’ 시인의 ‘봄길’ 중의 일부분이다. 우리는 누구나 길이 끝난 곳에서 새로운 길이 되어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그리고 사랑이 끝난 곳에서 새로운 사랑이 되어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한다. 그것이 우리의 영원한 바램이며 화두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찾아오는 이 따뜻한 봄에, 스스로 봄길이 되는 봄 같은 사람을 만나, 그 사람과 함께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렇지만 겨울이 없다면 봄은 그리 즐겁지 않을 것이다. 고난을 맛보지 않으면 성공이 반갑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봄이라는 이름은 겨울을, 그리고 가을을, 마땅히 떠올려야 하는 숙제요, 반드시 짚어야 할 의무다. 그것이 바로 참으로 사람이 살아가는 정의이며 진실이다. 또한 잊어서는 안될 고리다.

전 세계에 이름이 알려진 저명한 의사인 그는 ‘노벨평화상’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아프리카’를 떠나 ‘파리’까지 간 후 다시 기차를 타고 ‘덴마크’로 갈 계획이었다. 그가 기차를 타고 파리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기자들은 취재를 위해 너도 나도 그가 탄 기차에 몰려들었다. 기자들은 특실 칸을 샅샅이 뒤졌다. 당연히 세계적인 유명인사이니 특실에 탔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는 그곳에 없었다.

혹시 특실좌석이 매진되어서 못 탔나 싶어 1등석도 그리고 2등석까지도 찾아봤지만 역시 그를 찾을 수 없었다. 당황한 기자들은 쓰레기와 오물이 악취를 풍기고, 남루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딱딱한 나무의자에 모여 있는 3등석 객차에서 한 소녀를 진찰하고 있는 그를 만날 수 있었다. 한 기자가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 왜 고생스럽게 지저분하고 불편한 객차를 이용해 다니시는 겁니까?”

그러자 그가 기자에게 인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편안한 곳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저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곳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특실에는 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없더군요.” 희망 없이 비참하게 살아가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평생 헌신적으로 의료봉사를 한 그는 바로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였다. 보통의 많은 사람은 성실하게 노력하며 살아간다. 열심히 공부해서 자신의 능력을 쌓고 열심히 일한다.

이렇게 사람들이 노력하는 이유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다. 하지만 세상은 ‘나의 필요’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 모든 노력과 희생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여전히 따뜻하기만 하다. 내가 가진 것을 내주는 것은 조그마한 베풂이다. 하지만 나를 헌신하는 것은 진정한 베풂이다. 우리가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고정관념을 떠나 언제나 변화하는 일상에 나를 깎고 다듬어 적응시켜가는 일련의 과정이다.

세상이 나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이기심과, 나만의 편의 위주로 세상사를 해석하는 독선으로 바라보는 오늘은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겸손함의 단계 보다도 더 나를 낮추는 겸허함으로 세상과 이웃을 대할 때, 모든 되어진 결과를 한탄하고 비판하기 보다는, 모든 잘못된 것조차 용서하고 아량으로 감싸는 온유의 마음을 지니고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 아름답고 따뜻한 오늘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쟁터에서 병사들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한 탈영병이 체포되어 사령관인 장군 앞으로 끌려 왔다. 그 병사가 탈영하다 체포된 것은 벌써 5번 째였다. 전투 중 탈영은 당시 군법으로 사형이었다. 하지만 병사를 자식처럼 아끼는 장군은 계속해서 그 병사에게 사형선고를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더는 작은 처벌로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장군은 결심했다.

그리고 비통한 마음으로 병사에게 말했다. “훌륭한 병사로 만들기 위해 가르치고, 정신과 육체를 단련시켰다. 그리고 수차례의 탈영을 저질렀지만, 처벌을 미루고 온갖 방법으로 마음을 바꾸려 노력했는데도 또다시 조국을 배신하고 말았다. 이에 죄를 물어 엄정한 군법으로 사형을 선고한다.” 병사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지자 장교 한 명이 장군에게 말했다. “장군님은 저 병사를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고 하셨지만 아직 한 가지 해보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장군은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물었다. “바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장군님은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해 주시는 것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장교의 말에 장군은 탈영병을 조건 없이 용서해 주었다. 큰 깨달음을 얻는 병사는 다음 전투 때 선두에 서는 용감한 병사가 되었다. 누군가를 벌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나의 분노를 어두운 마음으로 토해내는 것이다. 그러나 용서한다는 것은 나의 마음 속 분노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존심까지 내려놓아야 한다.

당연히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진심어린 용서는, 어떤 가혹한 처벌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법이다. 용서는 과거를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러나 미래를 넓혀준다. 그렇게 용서라고 하는 단어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힘은 모든 결과를 뒤집을 수 있고, 모든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봄이라는 틀에 나 자신을 꿰어맞추려고 하는 어리석은 마음이 있으면 단편적인 삶의 형식에서도 벗어날 수 없다. 봄은 의례껏 이래야 한다, 저래서는 안 된다 하는 속단이 결국, 자신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굴레 속으로 밀어버린다는 것을 명심하자.

기왕이면 계절에 어울리는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것을 가지자. 세상은 하루 밤을 자고 나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을 절제하지 못하게 유혹하고 있다. 사람마다 추구하는 것이 달라서, 어느 사람은 더 많은 재물을 소유하기 위해서 끊임 없이 모으고 있다. 지식을 소유하기를 원하고, 사회적인 그리고 후세에 남을 명예를 원하기도 하며, 의롭고 선하게 살기를 원해서 불의와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으며 절개를 지키는 사람도 있다.

바로 자기 안에 사상이 있다. 마음에 생각하는 그것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며 살아가지만 결국은 그 어떤 것도 만족을 주지 못하고 있다. 마음을 다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재물도, 명예도, 지식도, 그리고 선하고 의롭게 산 것도, 마음에서 만족할 수 있을 만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하고 있는 것을 가지면 될 것 같아서, 인생을 걸면서 그것을 가지려고 전쟁을 하듯이 싸우지만 가져도 가져도 부족하기만 한 것이다.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것을 가지자. 사람들이 갖고자 수고하고 애쓰는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자기 자신의 마음 속에 있다. 그것을 가지면 배가 부르듯이 마음을 채워서 포만감이 넘칠 것이다. 물질은 육체의 영역, 정신은 영혼의 영역이라 생각한다. 육신의 영역에 있는 것은 아무리 자신을 위해 소유하고자 해도, 때로 그것은 자신을 향하는 무기가 될 때가 많다.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이 지나치면 소유하기 위한 방법이 불합리하거나 정당하지 못해 결국 스스로를 피폐하게 만들 뿐 아니라, 함께 하는 이들조차도 불행으로 이끄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반면 정신을 위한 투자는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고 평안을 주며, 안색을 밝게 하여 그를 바라보는 이들에게까지 행복감을 느끼게 해준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계절이 바뀌고, 또 다른 자연의 얼굴들이 우리를 찾아줄 것이다. 욕심을 내지 않아도 당연히 찾아주는 수많은 기적과 찬란한 내일이 바로 우리가 갖고 있는 자산이다.

내일 태양이 뜰텐데도 비가 올 거라고 걱정하는 당신에게, 행복과 불행의 양이 같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아직 슬픔에 젖어있는 당신에게, 늙기도 전에 꿈을 내던지려고 하는 당신에게, 또한 세상은 꿈꾸는 자의 것이라는 진리를 아직 외면하고 있는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은 상처받기를 두려워할 만큼 아직 늙지 않았다. 멀리뛰기를 못할 만큼 다리가 허약하지 않다. 우산과 비옷으로 자신을 가려야할 만큼 외롭거나 비판적이지도 않다. 또 무엇보다 당신의 시력, 눈은 별을 바라보지 못할 만큼 나쁘지도 않다.

당신에게 필요한 건 단 한 가지, 마음을 바꾸는 일이다. 마음을 바꾸면 인생이 바뀐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옛 노트에 적어보는 일이다. 당신이 한 때 가졌던, 그리고 아직도 당신 가슴 속에서 작은 불씨로 남아있는 그 꿈을 실현시키는 일이다. 한 쪽 문이 닫히면 언제나 다른 쪽 문이 열리게 된다. 문이 닫혔다고 실망하는 당신에게, 다른 쪽 문을 찾아보기를 두려워하는 당신에게, ‘앙드레 지드’가 말했다. “지상에서 아무 것도 집착하지 않고 부단히 변화하는 것들 사이로 영원한 열정을 몰고 가는 자는 행복하여라.”

오늘은 당신을 위해 이 시작노트를 쓴다. 당신이 이 글의 주인공이기를 원한다. 삶은 때론 낯설고 이상한 것이긴 하지만, 신은 목적을 갖고 당신을 이 곳에 있게 했다. 그 목적을 외면한다면 당신은 외롭고 고립될 수 밖에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배움을 충분히 실현할 만큼 당신은 이미 완전한 존재다. 당신이 당신의 삶을 창조한다. 다른 그 누구도 당신을 대신할 수 없다. 불면의 밤을 헤치고, 자기 자신과 대면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당신에게, 경험하기 위해 세상에 왔음을 안 당신에게, 창조적이고 평상적인 삶을 두려워하지 않는 당신에게, 봄을 봄으로 가슴에 담고 있는 당신에게, 필자는 오늘 이 글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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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흘러가는 시절만큼
주섬주섬 누려지던 연정

언젠가는
이리 될 줄 진즉 알곤 있었건만
무에 그리 급해서
시절 훨씬 앞질러
제 갈 길 가버렸누

측량키도 어려운
절절한 그리움에
화톳불로 치솟는
열정만 맴 맴 도는 걸

잘 봐 -
나 단추 풀렀쟎아 -
앞자락 걷었쟎아 -
가슴팍 죄 열어제낀 거 -
섧은 내 심장 뛰는 거 -
너만 봐,

워낙 깊게 자리해
눈에 추억 어리면 종내
주룩주룩
눈물 흐를 듯 하여
눈 감은채로 되새기는 얼굴

보고 싶어 -

하도 사연 기막혀
귀에 소리 들리면 필경
대책없이
울어버릴 듯 하여
입속으로만 읊조리는 그 말

보고 싶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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