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네번째 가상詩集입니다.

2012년 봄부터 씌여진 詩들입니다.
實驗詩적인 성격의 習作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오늘까지 계속 이어져오는 역사의 章입니다.

처음 詩人의 길에 入門한 이래로
이제껏 40년 이상을 지어온 詩이지만 아직도
정확한 詩의 정의를 내리지 못한 채,

판도라의 상자를 가슴에 품어안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풍운아로 떠돌며
詩의 본질을 찾아 헤매고 있는
詩人 林森의 애환이 드러나 있습니다.

林森의 고행은 그래서
지금도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그의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쭈욱 ~~

詩人의 멍에를 天刑으로 걸머지고 있는 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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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의 곳간 *



시작노트

" 눈물의 곳간 " 詩作 note

지면을 통해서 종교에 관련한 이야기는 가급적 금하고 있되, 개인적으로 필자는 기독교인이다. 그것도 소위 모태신앙이라고 불리는 골수분자다. 말하자면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기독교인으로 태어나고 자랐다는 것이다. 그렇게 추론해보면 이미 60여년이 넘은 신앙의 연조를 가지고 있으니, 믿음도 또한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어야 함은 자명한 이치다. 그런데 웬 걸? 필자는 아직도 초보자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야말로 반쪽 신앙인으로 살고 있다.

젊은 시절에는 무엇이 그리 바쁜지, 도무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시간적 짬이 도통 나지를 않더니, 나이가 이만큼 들고 나서는 교회가는 일이 별로 재미도 없고 신도 안나서 예배 참석하는 일에 영 게으르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에게 대놓고 기독교인이라고 말하지도 못하는 처지다. 그저 속으로만 끙끙거리며 벙어리 냉가슴 앓듯, 자라지 못하는 신앙에 전전긍긍할 따름이다. 여간 처량맞고 불쌍한 게 아니다.

예컨대 이렇게 뺑뺑이 치다가 생 마감할 거라는 건 불 보듯 자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신앙사랑은 은근히 뜨겁다. 비록 겉으로 들어나는 삶의 지표는 못될지언정,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모범이 되거나 효시가 되는 삶의 모양새는 드러내지 못하는 폼새지만,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다가올 내일도 필자의 생활신조는 한결같다. 그저 남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고, 조금이나마 남을 도우며 살아가는 착한 삶이었으면 하는 이 바람은 오래 묵은 필자의 푯대다.

비록 서글프고 고달픈, 그래서 언제나 삶의 곳간에 눈물과 한숨이 꽉 들어찬 보잘 것 없는 여정이지만, 늘 부족함과 못남을 깊이 깨닫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는 자세가 삶의 좌우명일진대, 한 살씩 나이를 먹어가는 이 세월에 어찌 자그마한 빛이라도 자체발광하지 못할 손? 그냥 그런 우스운 자위를 하면서 필자는 5월의 마지막 일요일, 오늘 아침에도 교회로 향한다.

일전 어느 간호사의 고백에 가슴이 저렸었다. 아마도 누구라도 거울을 보는 느낌을 지울 순 없었으리라 생각하게 되는 고백이었다. - 저는 암 병동에서 근무하는 간호사입니다. 야간 근무를 하는 어느 날 새벽 5시, 갑자기 병실에서 호출 벨이 울렸습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 호출 벨 너머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환자에게 말 못할 급한 일이 생겼나 싶어 부리나케 병실로 달려갔습니다.

병동에서 가장 오래된 입원 환자였습니다. “무슨 일 있으세요?” “간호사님, 미안한데 이것 좀 깎아 주세요.”라며 사과 한 개를 쓱 내미는 것입니다. 헐레벌떡 달려왔는데 겨우 사과를 깎아달라니... 큰 일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맥이 풀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의 옆에선 그를 간호하던 아내가 곤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이런 건 보호자에게 부탁해도 되는 거잖아요?” “미안한데 이번만 부탁하니 깎아 줘요.”

한 마디를 더 하고 싶었지만, 다른 환자들이 깰까 봐 사과를 깎았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더니 심지어 먹기 좋게 잘라달라고까지 하는 것입니다. 할 일도 많은데 이런 것까지 요구하는 환자가 못마땅해서 저는 귀찮은 표정으로 사과를 대충 잘라 놓고 침대에 놓아두곤 발길을 돌렸습니다. 성의 없게 깎은 사과의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환자는 아쉬운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그래도 전 아랑곳하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환자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며칠 뒤 그의 아내가 수척해진 모습으로 저를 찾아 왔습니다. “간호사님... 사실 그 날 새벽 사과를 깎아 주셨을 때 저도 깨어 있었습니다.그 날이 저희 부부 결혼기념일이었는데, 아침에 남편이 선물이라며 깎은 사과를 저에게 주더군요. 제가 사과를 참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남편은 손에 힘이 없어 사과를 깎지 못해 간호사님께 부탁했던 거랍니다. 저를 깜짝 놀라게 하려던 남편의 마음을 지켜주고 싶어서 죄송한 마음이 너무나 컸지만, 모른 척하고 누워 있었어요. 혹시 거절하면 어쩌나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그 날 사과를 깎아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저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 새벽 가슴 아픈 사랑 앞에 얼마나 무심하고 어리석었던가? 한 평 남짓한 공간이 세상 전부였던 그들의 고된 삶을 왜 들여다보지 못했던가? 한없이 인색했던 저 자신이 너무나 실망스럽고 부끄러웠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제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었습니다. 그리고 말해주었습니다. “고마워요. 남편이 마지막 선물을 하고 떠날 수 있게 해줘서...” -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 사소한 도움이라도 요청한다면 기꺼이 도와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너무 사소하여 지나쳐버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누군가에게 사소한 일이 또 누군가에겐 가장 절박한 일일 수 있다는 것만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행복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 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새삼 머리 속에 맴도는 이유다.

우리가 오늘을 살고 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어제를 살아내면서 우리는 어떤 의미를 심어놓았었을까? 내일 우리에게 주어질 삶의 페이지에 우리는 어떤 의미를 준비하여 채워갈 것인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필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퍽이나 분주타. 답은 없는 문제의 해결을 위한 보헤미안의 여정이, 고달프게 이어지는 집시의 방랑 같아서 딴에는 무척 슬프다. 그래서 버겁다.

온 몸이 돌로 변하는 병에 걸린 마흔 살 아들과, 아들을 돌보는 환갑 어머니가 펼치는 일상의 희로애락. 삶이 근사하지만은 않기에 슬퍼할 수만도 없는 돌시인. 희귀병으로 신음하다 세상을 떠난 ‘박진식’ 시인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필경 행복 보다는 불행이, 희망 보다는 좌절이 훨씬 진하게 드리워진 짧은 삶을 살고 갔음에도, 심금을 울리는 주옥같은 글들을 우리의 가슴 언저리에 던져놓고 간 시인을 추모하며, 필자는 가끔 하늘에서 손짓하고 있는 시인의 활짝 웃는 얼굴을 그리워한다.

매일 비가 오는 건 아니듯 언제나 슬픔이란 없고, 언제나 괴로움이란 없고, 언제나 힘듦이란 없다고 한다. 어차피 힘겨운 삶 속에서 우리는 종종 넘어지곤 한다. 하지만 곁에서 지켜봐주는 가족과, 멀리서 응원을 보내는 수많은 마음으로 인해 다시 일어설 힘을 얻게 된다. 그렇게 서로 기대고 격려하면서 세파를 헤쳐 나간다. 그래서 인지상정이다. 더 나은 사람도, 조금 모자란 사람도 하나로 힘을 모아서 고해를 거슬러 내일로 나간다. 그게 만고진리다. ‘헬렌 켈러’는 말한다.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사람들로도 가득하다.”

- 어머니의 얼굴이 항상 밝지는 못합니다. 허리 병에 골다공증, 목 디스크까지... 이제는 저보다 더 보살핌이 필요한 어머니지만 이 못난 아들은 여전히 어머니의 돌봄이 필요합니다. 어머니도 지치실 때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누군가 “왜 그렇게 힘든 데도 계속 사냐?” 라고 묻는다면 “어머니의 사랑이 날 살게 했다.” 라고 답할 것입니다. ‘머리 감고 싶어요, 일으켜 주세요, 등을 긁어주세요.’ 항상 바라는 것 많은 아들과 옥신각신하지만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활짝 웃으며 내 얼굴을 보듬는 어머니.

가끔은 포기하고 싶고, 화가 나기도 하고, 슬픔에 머리끝까지 잠겨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들이 종종 찾아오지만, 언제나 내 손을 붙잡아준 것은 어머니, 바로 당신입니다. 뭐가 그리 좋다고 이 자신을 세상에 내놓으셨나요. 저는 사람답게 살려고 웃고 또 웃었습니다. 어머니 가슴에 미소를 띠며 떠나는 것 그 일념으로 참았습니다. 그런데도 저에게는 제가 없고 이해도 못 한 눈시울만 있습니다. - 박시인의 ‘어머니’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내친 김에 한 편만 더 보자. 시 ‘사모곡’에 들어있는 내용이다. - 두 발로 걷는 것, 혼자 머리를 감는 것, 앉아서 음식을 먹는 것... 남들처럼 평범한 일상이 제게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저는 돌입니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딱딱한 돌처럼 굳어버린 몸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집니다. 이 끔찍한 병의 원인을 아직도 알지 못합니다. 온종일 두 평 남짓한 방에 누워 지낸 지도 26년. 분노, 슬픔, 괴로움, 기대, 좌절, 소망. 고된 하루는 시가 되어 세상으로 날아갑니다.

나도 함께 날아갈 수 있다면 정말 좋겠어요. 그러나 저에게는 든든한 기둥이 있습니다. 바로 제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책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쓴 시만큼은 돋보기를 쓰면서도 읽고 또 읽으며 기뻐하십니다. “우리 아들이 시인이 되었다.”고 동네방네 자랑하시는 것은 물론이죠. 그런 어머니와 함께 겪은 일상들은 또다시 보석처럼 영롱한 시어가 되어 반짝입니다. 어머니의 얼굴도 항상 반짝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당신은 내게 늘 바람막이가 되고 나는 늘 당신의 모진 바람만 되는 것을 -

절절한 육신으로 절규한 비명같은 이 시, 하늘에 닿을 듯 깊은 떨림의 영혼으로 빚은 이 시, 이런 시에 시평을 달아볼 용기 있는 문인 있다면 얼굴 한 번 보고 싶다. 사용한 시어가 어떻고, 내용이 어떻고, 주저리 주저리 감상평을 거론해볼 독자 있다면 한 번 만나보고 싶다. 무슨 댓글이 필요하고, 어떤 첨언이 필요할까? 모두 다 쓸 데 없는 췌언인 것을. 그저 하늘을 향해 되도 않는 원망을 한 바가지 쏟아붓고 싶다. 종주먹 들이대며 세상 향해 함성이라도 목청껏 내지르고 싶다.

세상 참 엿같다. 어찌 이런 착한 사람에게 이다지 가혹한 운명의 굴레를 씌울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고 보면 조금이라도 일찍 하늘로 간 시인이 차라리 잘 한 건지도 모르겠다. 도대체가 기대할 것 없는 이 세상 천지에 무슨 미련 남았다고 구질구질한 구걸마냥 목숨 더 연명해야 할까? 아예 깨끗하게 빚 청산하듯 세상의 인연 싹뚝 자르고 떠난 시인이 그래서 무척이나 존경스럽다. 아주 잘한 짓이다. 역시 시인은 필자의 우상이다.

어느 일류대 졸업생이 한 대기업에 이력서를 냈는데 사장이 면접 자리에서 의외의 질문을 던졌다. “부모님을 목욕시켜 드리거나 발을 닦아드린 적이 있습니까?” “한 번도 없습니다.” 라고 그 청년은 정직하게 대답했다. “그러면, 부모님의 등을 긁어드린 적은 있나요?” 라고 다시 묻자 청년은 잠시 생각했다. “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등을 긁어드리면 어머니께서 용돈을 주셨죠.” 청년은 혹시 입사를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잠시 후 사장은 청년의 마음을 읽은 듯 “실망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라.”고 위로했다.
정해진 면접시간이 끝나고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자 사장이 이렇게 말했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오세요.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부모님을 닦아드린 적이 없다고 했죠? 내일 여기 오기 전에 꼭 한 번 닦아드렸으면 좋겠네요. 할 수 있겠어요?” 청년은 꼭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반드시 취업을 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지 얼마 안돼 돌아가셨고 어머니가 품을 팔아 그의 학비를 댔다. 어머니의 바람대로 그는 명문대학에 합격했다. 학비가 어마어마했지만 어머니는 한 번도 힘들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이제 그가 돈을 벌어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해야 할 차례였다. 청년이 집에 갔을 때 어머니는 일터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청년은 곰곰이 생각했다. ‘어머니는 하루 종일 밖에서 일하시니까 틀림없이 발이 가장 더러울 거야. 그러니 발을 닦아드리는 게 좋을 거야.’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아들이 발을 씻겨드리겠다고 하자 의아하게 생각했다. “왜 발을 닦아준다는 거니? 마음은 고맙지만 내가 닦으마.” 어머니는 한사코 발을 내밀지 않았다. 청년은 어쩔 수 없이 어머니를 닦아드려야 하는 이유를 말씀드렸다. “어머니, 오늘 입사 면접을 봤는데요, 사장님이 어머니를 씻겨드리고 다시 오라고 했어요. 그래서 꼭 발을 닦아드려야 해요.”

그러자 어머니의 태도가 금세 바뀌었다. 두말 없이 문턱에 걸터앉아 세숫대야에 발을 담갔다. 청년은 오른손으로 조심스레 어머니의 발등을 잡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가까이서 살펴보는 어머니의 발이었다. 자신의 하얀 발과 다르게 느껴졌는데 앙상한 발등이 나무껍질처럼 보였다.“어머니! 그동안 저를 키우시느라 고생 많으셨죠. 이제 제가 은혜를 갚을게요.”

“아니다 고생은 무슨…….” “오늘 면접을 본 회사가 유명한 곳이거든요. 제가 취직이 되면 더 이상 고된 일은 하지 마시고 집에서 편히 쉬세요.” 손에 발바닥이 닿았다. 그 순간 청년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아들은 말문이 막혔다. 어머니의 발바닥은 시멘트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도저히 사람의 피부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머니는 아들의 손이 발바닥에 닿았는지 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발바닥의 굳은 살 때문에 아무런 감각도 없었던 것이다.

청년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고개를 더 숙였다. 그리고 울음을 참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새어나오는 울음을 간신히 삼키고 또 삼켰다. 하지만 어깨가 들썩이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한 쪽 어깨에 어머니의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청년은 어머니의 발을 끌어안고 목을 놓아 구슬피 울기 시작했다. 다음 날 청년은 다시 만난 회사 사장에게 말했다.

“어머니가 저 때문에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이제야 알았습니다. 사장님은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해주셨어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만약 사장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어머니의 발을 살펴보거나 만질 생각을 평생 하지 못했을 겁니다. 저에게는 어머니 한 분 밖에는 안계십니다. 이제 정말 어머니를 잘 모실 겁니다.”

사장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용히 말했다. “인사부로 가서 입사 수속을 밟도록 하게.” 지혜로운 사장의 면접을 통해서 부모님의 은혜를 일깨워 준 아름다운 이야기다. 한 평생 살아오면서 필자는 과연 어머니의 고된 삶을, 희생을 얼마나 뼈저리게 느끼고 살아왔을까? 아니, 천 분의 일이라도 감히 추측이나 했을까? 자신의 삶만 소중하고 시급하여 다른 어느 누구도, 심지어 부모님까지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살아온 지난 날들이 문득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오늘 하루 만이라도 어머니의 발을 한 번 씻겨 드려야겠다.

이 삶의 곳간에 쌓여있는 눈물의 대부분이 사실은 부모님이 흘리신 눈물의 흔적이란 것을 이제사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건만, 필자의 삶이라는 게 나날이 더 팍팍하고 척박하여 따스한 말 한 마디, 작은 정성 하나조차도 인색하기만 하니 연로하신 부모님의 가슴에 대못일랑은 얼마나 무수히 박아댔었을까? 흘러간 세월의 뒤안길에서 쓸쓸히 눈물짓는 부모님의 환영이 답답한 가슴에 주홍글씨로 새겨지는 것 같다.

‘자이가르닉 효과(Zeigarnik effect)’란 말이 있다. 끝마치지 못하거나 완성되지 못한 일이 마음 속에 계속 떠오르는 현상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 효과는 ‘러시아’의 심리학과 학생이던 ‘블루마 자이가르닉’과 그녀의 스승이자 사상가인 ‘쿠르트 레빈’이 처음 제시한 이론이다. 이 효과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계기는 무척 흥미롭다.

자이가르닉이 식당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종업원들을 보던 중 흥미를 끄는 장면을 포착한다. “저렇게 수많은 손님들로부터의 주문을 받는 웨이터들은 어떻게 헷갈리지도 않을까?” 신기하게 바라보던 그녀는 자기 음식을 날라다준 웨이터에게 조금 전 옆 테이블에 갖다놓은 메뉴가 뭐였냐고 물었다. 그런데 웨이터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스스로도 당황해하는 것이었다.

자이가르닉은 이 부분에 착안해 연구를 시작했다. 한 그룹은 일을 끝내도록 설정하고, 다른 그룹은 일을 끝마치지 못하게 방해를 하는 실험을 한 결과 업무 종료 후, 일 도중에 방해를 받은 그룹이 자신이 수행한 업무에 대해 더 잘 기억했다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즉, 완결되지 않은 문제는 계속 기억에서 떨쳐내지 못하는 반면, 마무리 지은 일은 기억에서 깨끗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시험에서 틀린 문제를 더 오래 기억하거나, 이뤄지지 않은 첫사랑, 혹은 지나간 연인을 안타깝게 잊지 못하는 것 또한 자이가르닉 효과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자이가르닉 효과는 경제용어로도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다양한 티저 광고나 마케팅, 게임, 방송 등에 활용하기도 한다. 특히 우리가 흔히 접하는 드라마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해당 회차의 방송을 끝내는 것 또한 이러한 자이가르닉 효과를 활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연히 필자가 부모님께 잘 해드리지 못하여 늘 전전긍긍하는 것도 일종의 자이가르닉 효과에 준한다고 할 수도 있다.

효도라고 하는 것에 완성형이 존재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손 쳐도 온 정성을 다해 후회 없는 효도를 해드린 사람들이야 회한도 고뇌도 있을 리 없겠지만, 아무리 곱씹어 되돌아봐도 잘 한 구석은 눈을 씻고 찾아보려 해도 도무지 찾기 힘든 필자의 처지는 더도 덜도 말고 자이가르닉 효과일 따름이다. 효도는 이 눈물의 곳간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과제다.

‘린다 버티쉬’는 문자 그대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다 내준 사람이다. 그녀는 원래 뛰어난 교사였는데, 자기에게 시간이 주어진다면 언젠가 위대한 시와 그림을 창조하리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스물여덟 살이 되던 해, 그녀는 갑자기 심한 두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병원 의사는 그녀가 심각한 뇌종양에 걸려 있음을 발견했다. 수술을 해서 살아날 확률은 2퍼센트 밖에 안된다고 병원 측은 말했다. 따라서 당장 수술을 하는 것보다는 여섯 달 동안 기다려 보기로 결정이 내려졌다.

린다는 자신 속에 위대한 예술적 재능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여섯 달 동안 그녀는 열정적으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그녀가 쓴 모든 시는 한 작품을 제외하고 모두 문학잡지에 게재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그림은 한 작품만 제외하고 모두 유명한 화랑에서 전시되고 판매되었다. 6개월 뒤 그녀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 전날 밤 그녀는 자기 자신을 다 내주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유언장에다 썼다. 그녀가 죽을 경우 신체의 모든 장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기증하겠다고.

불행히도 수술은 실패했다. 그 결과 그녀의 두 눈은 ‘메릴랜드 베데스다’에 있는 안구 은행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다시 ‘사우스 캐롤라이나’에 있는 한 수혜자에게 기증되었다. 그리하여 28세의 한 청년이 암흑에서 빛을 찾았다. 청년은 너무도 고마움을 느껴 안구 은행에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는 그 안구 은행이 3만 회가 넘는 안구 기증을 주선한 뒤에 받은 두 번째 감사의 편지였다.

나아가 청년은 기증자의 부모에게도 고마움을 표시하기를 원했다. 눈을 기증한 자녀를 두었으니 부모 역시 훌륭한 사람들일 것이라고 청년은 생각했다. 버티쉬 가족의 이름과 주소를 전해 받은 청년은 그들을 만나기 위해 ‘뉴욕’ 주의 ‘스태튼 아일랜드’로 날아갔다. 그는 예고도 없이 도착해 벨을 눌렀다. 청년의 자기 소개를 들은 버티쉬 부인은 두 팔을 벌려 청년을 포옹했다. 그녀는 말했다. “젊은이, 마땅한 곳이 없거든 우리 집에서 주말을 보내요. 내 남편도 그걸 원하니까.”

그래서 청년은 그 집에 머물기로 했다. 린다가 쓰던 방을 둘러보던 청년은 그녀가 수술을 받기 전에 ‘플라톤’을 읽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 역시 같은 무렵 점자책으로 플라톤을 읽고 있었다. 그녀는 또 ‘헤겔’을 읽고 있었다. 그도 점자책으로 헤겔을 읽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버티쉬 부인이 청년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디선가 젊은이를 본 적이 있는 것만 같아요. 그런데 그곳이 어딘지 생각이 안나요.”

그러더니 그녀는 갑자기 기억을 해냈다. 그녀는 위 층으로 달려가 린다가 그린 마지막 그림을 가져왔다. 그것은 그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남자의 초상화였다. 그림의 주인공은 린다의 눈을 기증받은 그 청년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린다의 어머니는 린다가 임종의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쓴 시를 젊은이에게 읽어주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 밤을 여행하던 두 눈이 사랑에 빠졌어라. 서로의 얼굴을 한 번도 바라볼 수도 없이 멀리 떨어져있지만. -

사람의 영혼이란 때로는 도저히 상식과 경험으로는 이해할 수도, 짐작할 수도 없는 신비로운 현상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이른바 텔레파시의 교감이라든지, 영적 교류나 시공을 초월한 소통 같은 불가사의한 결속을 우리에게 보여주기도 한다. 형이상학적인 형상이나 사차원의 세계에서 볼 수 있을 모호한 실체를 느닷없이 드러내보이곤 한다. 소위 매직아이를 능가하는 착시현상을 유도하기도 한다. 삶이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증빙이 우리를 새삼 놀라게 한다.

필자는 이 아침에 사고한다. 써놓은 글이라는 게, 주어진 삶의 모습들을 시간이라는 매체를 통해 늘어놓는 필자의 하찮은 넉두리에 불과하겠지만, 어차피 주어진 의무가 글을 쓰는 일이라면 중구난방으로 휘갈겨진 이 글들이, 세상을 치열하게 사는 다른 어떤 사람들의 삶의 곳간에 조금이라도 필요한 정신의 일용 양식이 되어지기를 소박한 마음으로 바란다. 그래서 심사숙고한다. 가능하다면 지금 보다는 낫게, 글 좀 잘 써보려고 잔머리 열심히 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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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가운데 자리
지키고 앉아 또아리 튼 슬픔,

슬픔에 넌덜머리나서
기쁨 찾으러 간 기도 시간

그런데 놀랍게도
정직한 절망으로 슬픈 오늘
살며시 다가와서
위안도 되고, 용기도 되고
의미까지 되어주는 건

기세등등 콧대 높은 기쁨이 아니라
은근한 노래 사이 문득 배어나는
저린 슬픔, 너였구나

비록 슬프기만 해도
어차피 슬플 수 밖에 없는 거라 해도
해서 슬픈 삶 쭈욱 살아갈 거라 해도

내 슬픔
보석마냥 빛 발하는 아침 공간,
내게 보내주는 신앙의 송가

하늘에서는 지금 막
슬픔의 노래가 내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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