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네번째 가상詩集입니다.

2012년 봄부터 씌여진 詩들입니다.
實驗詩적인 성격의 習作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오늘까지 계속 이어져오는 역사의 章입니다.

처음 詩人의 길에 入門한 이래로
이제껏 40년 이상을 지어온 詩이지만 아직도
정확한 詩의 정의를 내리지 못한 채,

판도라의 상자를 가슴에 품어안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풍운아로 떠돌며
詩의 본질을 찾아 헤매고 있는
詩人 林森의 애환이 드러나 있습니다.

林森의 고행은 그래서
지금도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그의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쭈욱 ~~

詩人의 멍에를 天刑으로 걸머지고 있는 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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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벧엘, 11월 *



시작노트

" 벧엘, 11월 " 詩作 note

‘나’ 라는 모습의 껍질이 있다.
남자의 껍질과 여자의 껍질, 잘남의 껍질과 못남의 껍질, 가문의 껍질과 직위의 껍질, 지식의 껍질과 무식의 껍질, 부유의 껍질과 빈곤의 껍질, 교만의 껍질과 이기심의 껍질, 허영의 껍질과 비굴함의 껍질, 권위의 껍질과 권력의 껍질, 허물의 껍질과 독선의 껍질, 탐욕의 껍질과 성냄의 껍질, 어리석음의 껍질과 현명함의 껍질, 맑음의 껍질과 탁함의 껍질, 승리의 껍질과 패배의 껍질....
수두룩하여 이름조차 다 나열할 수 없는 껍질들이 ‘나’라는 모습을 겹겹이 감싸안고 있다.
두꺼운 껍질의 무게감으로 삶은 더더욱 힘겨워지기만 한다.
우리는 ‘나’라는 모습의 껍질 속에 있는 한은 결코 완성된 삶의 강을 건널 수가 없다.
나무로 만든 부처는 불을 건너지 못하고 흙으로 만든 부처는 물을 건너지 못하기 때문이다.껍질을 하나하나 벗겨낼 때 안에 담긴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껍질을 벗겨내려고 용기를 내어 노력할 때 비로서 보람과 희망의 결실을 얻을 수 있다.
또한 껍질을 벗어나 얽매이지 않을 때 참다운 자유와 행복을 맛볼 수 있다.
껍질이란 외형적 의미로는 의복이요, 내면적 의미로는 자기 포장이라 할 수 있겠다.
옷을 일기나 기후, 또 때와 장소에 맞지 않게 입으면 보기에도 아름답지 않거니와 본인 스스로도 많이 불편하다.
그리고 내면의 자기 포장 또한 옷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적절하면 그 아름다움이 굳이 애쓰지 않아도 말과 표정에서 절로 나타나지만 넘치면 가식이 되는 건 순식간이다.
가식은 본연의 모습과의 괴리이다.
그 괴리가 크면 클수록 마음은 고단해진다.
왜냐하면, 가식이란 거짓이기 때문이다.
거짓은 거짓을 낳고 그 거짓에 나를 맞추다 보면 진정한 나의 모습으로 돌아오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게 된다.
마치 먼 여행길에서 귀가를 하려면 그만큼 오랜 시간이 걸리듯 말이다.
우리들이 갖고 있는 에너지에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
그 에너지를 내 모습으로부터 이탈했다가 회귀하는 무의미한 곳에 사용하기 보다는 거짓 없는 내 모습 그대로의 시점으로부터 나날이 성장하는 데에 쏟아봄은 어떠할까 ?
벌써 11월이 시작되었다.
이제 올 해 달력도 달랑 두 장만 남게 되었다.
연말이 임박하여 허겁지겁 자신을 돌아보고 한 해를 반성하며 새삼 호들갑을 떨기보다는 지금쯤 미리 한 번 마음을 다잡아 지금까지 살아온 올 해의 모습을 되짚어보면서 천천히 삶의 질을 높이는 작업을 해보는 것도 괜찮을 성 싶다.

자신의 가치를 존중하고 자긍심을 느끼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데에 당연히 필요한 사항이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되면 아집과 독선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오직 자기의 주장만을 내세우며 다른 사람들과는 일절 어떠한 타협이나 조율 자체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이는 남을 인정하는 것이 마치 자신의 무능함이나 나약함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착각하여 쓸 데 없는 오기로 자신의 강함을 내세우려고 하면서 도무지 요령이나 중용은 절대적으로 배제한 처신으로 일관하는 답답한 경우를 일컫는다.
그러나 진정한 강함은 적당한 휘어짐 속에서 비롯된다.
“지구상에 살아남은 것은 ‘강한 것’이 아닌 ‘변화에 순응한 것’들이다.”
이 사실은 ‘종의 기원’을 쓴 ‘다윈’의 위대한 발견이다.
우리는 동물의 세계를 통해 변화에 순응하는 혁신의 지혜를 배울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근본적으로 자기만의 아집과 편견과 고정관념의 껍질에 둘러쌓여 있다.
스스로 구속하는 비좁은 마음 속에서 답답함을 못이겨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 것이 우리들의 나약한 자화상이다.
자기 혁신은 바로 이 껍질을 깨고 나오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조직 혁신 역시 이 벽을 깨야만 가능하다.
의식의 벽, 제도의 벽, 관행의 벽, 조직의 벽 등등 우리가 속해있는 이런저런 조직 속에는 또 얼마나 많은 벽이 존재하고 있는가 ?
문제는 나이가 많을수록, 경험이 많을수록, 지위가 높을수록 그 벽이 두텁다는 것이다.
그 두꺼운 껍질은 누구도 다른 사람이 깨주기 어렵다.
스스로 깨고 나와야 한다.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는 부화 과정이 바로 ‘자성반성(自性反省)’이다.
철저한 ‘자성반성’이 없이 자기 혁신, 조직 혁신은 불가능하다.
“여기 뒷다리에 5cm의 족쇄를 차고 있는 완전히 다 큰 코끼리가 있다.
그 족쇄는 2m 길이의 사슬에 연결되어 있고, 그 사슬은 땅에 박혀있는 말뚝에 묶여있다. 코끼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그 정도의 말뚝은 뽑아낼 수 있다.
그러나 코끼리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 코끼리가 사슬에 묶였던 때는 아주 어렸을 때였고 그 때는 그것을 움직일 만큼 힘이 세지 않았었다.
처음에는 말뚝을 뽑아내려고 여러 번 시도해 봤지만 얼마 안가서 그래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것을 어쩔 수 없는 자기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힘이 세어졌을 때도 코끼리는 더 이상 탈출을 시도하지 않는다.
건초, 물, 그리고 이따금씩 땅콩을 얻을 수 있는 약 6피트 정도의 반경 속에서 생활하는 것에 만족하며 지낸다.
코끼리들은 자기들이 쉽게 움직일 수 있는 말뚝에 묶여있으면서도 불이 날 경우 도망도 못 가고 그냥 죽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밥 좀머’의 ‘사이코 사이버네틱스 2000’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자신의 고정 관념, 타성, 선입견 등에서 벗어나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
우리 인간은 대부분 자신의 능력의 10%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혹시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그어버린 코끼리의 족쇄를 우리들도 차고 있지는 않은가 ?

“한 남자가 새를 잡으러 숲으로 갔다.
남자는 어린 독수리를 잡아 집으로 데려온다.
그리고 닭과 오리가 들어있는 우리에 넣고 닭모이를 줘서 키운다.
5년 후 독수리는 3m나 되는 날개를 갖고도 날지 않는 닭이 되어있었다.
우연히 이 집을 들른 동물학자는 독수리를 다시 날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닭모이에 만족한 독수리는 날기를 거부한다.
무엇이 문제일까 ?
동물학자는 독수리의 몸에 독수리 정신 대신 닭의 정신이 깃들어 있음을 본다.
어느날 그는 아침 해가 떠오르는 높은 산으로 올라가 웅장한 자연 앞에 독수리를 세운다.
문득 용솟음치는 힘에 마침내 독수리는 대지를 발판 삼아 힘차게 비상한다.”
‘제임스 애그레이’의 ‘날고 싶지 않은 독수리’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 속에는 틀 안에 머물지 말고 빗장을 풀어 세상을 경험하고 그 경험 속에서 부딪치는 좌절을 이겨내라는 교훈이 들어있다.
우리는 너무 변화를 두려워하고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이 독수리와 같지는 않은지도 반성해 볼 일이다.
‘이건희’회장의 ‘신 경영어록’에는 아주 적절한 예가 들어있다.
“바닷속의 조개는 주위가 조용하면 기어나와 활동을 시작하지만 시끄러우면 두꺼운 껍데기를 꼭 닫고 움직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흔히 ‘태풍이 지나갈 때는 머리를 숙여야 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극적이면서도 방관적인 자세야말로 자신을 망치고 발전의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일대 변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삼성 신경영’이라고 이름 지은 이 변화는 국내외에서 많은 기대와 함께 성공할 것이냐 실패할 것이냐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이러한 때에 삼성인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라도 바닷속의 조개처럼 뚜껑을 닫고 숨어서야 되겠습니까?
지금은 그 동안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무겁고 두꺼운 껍데기를 과감히 깨뜨려버리고 변화의 대열에 같이 서야 할 때입니다.”
이는 비단 삼성의 직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다.
인간의 전반적인 삶에서 적용되어야 할 우리가 반드시 새겨보아야 하는 충심이 이 말에는 진솔하게 담겨져있다고 여긴다.

1950년 일본의 ‘미야자키현 고지마’라는 무인도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 곳에는 원숭이가 20여 마리 살고 있었는데 이들의 먹이는 주로 고구마였다.
원숭이들은 처음에는 고구마에 묻은 흙을 손으로 털어내고 먹었는데, 어느날 한 살 반짜리 젊은 원숭이 한 마리가 강물에 고구마를 씻어 먹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원숭이들이 하나, 둘 흉내내기 시작했으며 ‘씻어 먹는 행위’가 새로운 행동 양식으로 정착해 갔다.
고구마 씻기를 하는 원숭이 수가 어느 정도까지 늘어나자 이번에는 ‘고지마’섬 이외 지역의 원숭이들 사이에서도 똑같은 행위가 동시 다발적으로 나타났다.
불가사의하게도 이 곳에서 멀리 떨어진 ‘다카자키’산을 비롯한 다른 지역에 서식하는 원숭이들도 역시 고구마를 씻어 먹기 시작했다.
서로가 전혀 접촉이 없고 의사 소통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마치 신호를 보내기라도 한 것처럼 정보가 흘러간 것이다.
미국의 과학자 ‘라이올 왓슨’은 이것을 ‘백마리 째 원숭이 현상’이라고 이름 붙였다.
어떤 행위를 하는 개체의 수가 일정량에 달하면 그 행동은 그 집단에만 국한되지 않고 공간을 넘어 확산되어가는 불가사의한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이 학설은 1994년에 인정되었다.
많은 동물학자와 심리학자가 여러 가지 실험을 한 결과, 이것은 원숭이 뿐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나 조류, 곤충류 등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세상을 밝혀 나가는 하나의 지혜를 배울 수가 있다.
세상의 가치관이나 구조란 깨달은 10%의 사람에 의해 바뀐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깨달으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먼저 10%가 깨달으면 사회와 세계를 바꿀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공을 초월한 ‘공명현상(共鳴現象)’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는 이유는 이처럼 누군가가 생각이나 행동으로 앞서가는 것을 보면 배우고 따라 하면서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여 얻기 위함이다.
원만한 대인관계를 외면하고 혼자 골방에 틀어박혀 있거나 어울려 있으면서도 무인도에 홀로 내쳐진 것처럼 생각한다면 이는 결코 올바른 삶의 자세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원숭이들도 알고 있는 소위 ‘공명현상’을 모르는 삶이 어찌 바람직한 삶의 태도라고 칭할 수 있겠는가 ?

‘차동엽’ 신부가 쓴 ‘무지개 원리’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한 사람이 낙천주의자에게 행복해지는 비법을 물었다.
“만약 당신이 모든 친구를 잃는다면 그래도 행복할 수 있나요 ?”
“그럼요, 비록 친구는 잃었어도 내 자신은 잃지 않았으니 행복하지요. 하하.”
“그럼 길을 가다가 진흙탕에 빠졌을 때도 그렇게 웃으시겠습니까 ?”
“그럼요. 제가 빠진 곳은 깊은 연못이 아니라 고작 진흙탕이잖아요. 하하.”
“길을 가다가 모르는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아도 기분이 좋으시겠어요 ?”
“그럼요. 주먹으로 한 대 맞았을 뿐이잖아요. 칼로 맞은 것보다야 낫죠. 하하.”
살다보면 이렇게 긍정적인 사람이 정말로 있다.
그런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오고 나도 모르게 생각이 밝아진다.
11월이 시작된 이 늦은 가을의 하루, 사람 사는 일에 무슨 법칙이 있고, 삶에 무슨 공식이라도 달리 있는 것은 아닐테지만 그래도 그냥 세상의 이치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바로 긍정의 삶이란 걸 깨달았으면 한다.
높푸른 가을의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자.
저기 두둥실 떠있는 한 조각 흰 구름이 보이지 않는가 ?
그저 바람 부는 대로 흘러가지만 그 얼마나 여유롭고 아름다운가 ?
진정 여유 있는 삶이란 내가 가진 만큼으로 만족하고 남의 것은 탐내지도 보지도 아니하며, 누구하나 마음 아프게 아니하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 슬픈 눈물 흐르게 하지 아니하며, 오직사랑하는 마음하나 가슴에 담고 물 흐르듯, 구름 가듯 그냥 그렇게 여유작작 사이 좋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지금 되새겨보았으면 한다.
“남들은 저리 사는데 나는 ?”
하고 부러워하지 말자.
깊이 알고 보면, 그 사람은 그 사람 나름대로 삶의 고통이 있고 근심 걱정이 있는 법이다.
옥에도 티가 있듯 이 세상에 완벽이란 언제까지나 존재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냥 내가 먼저 세상의 중심이 되고 껍질을 벗은 10%의 선각자가 되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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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이면,
너무나 오래 더께되어
엉긴 인연의 목숨줄
무심의 소치로 순수 망가뜨린
계절의 아바타가
낙낙한 가을미소 머금곤
어룽어룽 소리내는데

아주 가까이에서 발랑거리며
종종걸음치던 네가
떨리는 손끝 감춘 찰나
날 밀어버린 낭떠러지 끝자락
아 !
잎새지듯 나풀 떨어지고 보니

내 영원한 피난처는
바로 거기 터잡고 있었던 게야

벧엘,
11월이면
나의 벧엘에서는
어서 어서 오라 손짓하더니
내 긴 상념 속으로
계절만 자꾸 바뀌어지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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