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16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네번째 가상詩集입니다.

2012년 봄부터 씌여진 詩들입니다.
實驗詩적인 성격의 習作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오늘까지 계속 이어져오는 역사의 章입니다.

처음 詩人의 길에 入門한 이래로
이제껏 40년 이상을 지어온 詩이지만 아직도
정확한 詩의 정의를 내리지 못한 채,

판도라의 상자를 가슴에 품어안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풍운아로 떠돌며
詩의 본질을 찾아 헤매고 있는
詩人 林森의 애환이 드러나 있습니다.

林森의 고행은 그래서
지금도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그의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쭈욱 ~~

詩人의 멍에를 天刑으로 걸머지고 있는 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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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난 *



시작노트

" 아직도 난 " 詩作 note

어릴 때는 누구나 어른만 되면 뭐든 무조건 다 할 줄 알게 되는 걸로 믿는다. 어른은 만능이며 불사신이어서, 무엇이든 가능한 전지전능의 능력자일 거라고 알면서 커간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있는 대표적인 어른, 즉 부모의 그늘이 가장 안전하고, 부모의 품이 제일 편안하며, 부모의 힘만 받쳐준다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는 생각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라나서 본인이 어른이 되고, 세상의 야박한 이치를 깨달을 즈음이면 비로소 어른이 세상의 호구이며,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삶이라서 버겁게라도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저절로, 보여지는 진리가 얼마나 비참하고 살벌한지 아는 순간부터 우리는 어른이라는 명찰을 가슴에 달고 하루 하루를 이어간다. 그리고 그 명찰이 우리가 어렸을 적에 막연히 기대하고 바라마지 않던 그 영광의 이름은 결코 아니라는 엄연한 사실에 때로는 분노하고, 또 때로는 당황하면서도, 그것이 주어진 의무이며 소명이라는 준엄한 사실도 받아들이는 순종의 자세를 익혀간다. 비록 굴종과 치욕의 역사일 망정 우리는 우리의 오늘을 가능한 한 충실하게 메꾸면서 내일을 꿈꾼다.

그렇게 우리는 내일이라는 미지의 희망과 바람에 피곤한 오늘의 일상을 다걸기한다. 그리고 그 내일이라는, 아직은 오지 않은 시간에 불확실한 행운과 소원을 조심스레 싸들고 보헤미안의 길을 떠난다. 힘들고 거친 광야를, 폭풍우 몰아치는 대해를, 지표 없이 막연한 여정을, 무서워하지 않고 과감하게 도전한다. 설정해놓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행보, 그렇게 힘겹게 이룩한 성공의 결실을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한 역사의 장정을 우리는 부단히 이어간다.

이것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일상이 아니라, 사람으로 태어난 생명체라면 누구나 공동으로 갖고 있는 운명이며 팔자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면서 연민의 정으로 보듬는다. 간혹 예기치 않던 오해와 반목으로 다투기도 하고, 미움이 극에 달해 처절한 투쟁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아무튼 필자가 믿고 있는 것처럼 사람의 본성은 착하기에, 종국에는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해하면서 대화의 장을 멈추지 않고 열어간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진정 우리가 살면서 미워해야 할 사람이 이 세상에 흔한 것은 아니다. 원수는 맞은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작은 내 마음 속에 있을 때가 더 많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과, 또 다른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내 안에는 공존한다. 그러나 그 사랑도, 미움도 상대방보다는 내가 먼저, 내 마음이 먼저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먼저 마음의 벽을 쌓고, 오해를 만들고, 사소한 일에 미움을 만든 건 아닐까?

내 안의 미움을 먼저 털어내야 사랑이 깃드는 것. 그것이 진정 나 자신과 상대를 위한 것이다. 그러니 살면서 내 안에 많은 미움을 만들지 말자. ‘나’ 라는 모습의 껍질이 있다. 남자의 껍질과 여자의 껍질, 잘남의 껍질과 못남의 껍질, 가문의 껍질과 직위의 껍질, 지식의 껍질과 무식의 껍질, 부유의 껍질과 빈곤의 껍질, 교만의 껍질과 이기심의 껍질, 허영의 껍질과 비굴함의 껍질, 권위의 껍질과 권력의 껍질, 허물의 껍질과 독선의 껍질, 탐욕의 껍질과 성냄의 껍질, 어리석음의 껍질과 현명함의 껍질, 맑음의 껍질과 탁함의 껍질, 승리의 껍질과 패배의 껍질...

수두룩하여 이름조차 다 나열할 수 없는 껍질들이 나라는 모습을 겹겹이 감싸 안고 있다. 두꺼운 껍질의 무게감으로 삶은 더더욱 힘겨워지기만 한다. 나라는 모습의 껍질 속에 있는 한 결코 완성된 삶의 강을 건널 수가 없다. 나무로 만든 부처는 불을 건너지 못하고, 흙으로 만든 부처는 물을 건너지 못하기 때문이다. 껍질을 하나하나 벗겨낼 때 궁극적으로 안에 담긴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껍질을 벗겨내려고 용기를 내어 노력할 때, 보람과 희망의 결실을 얻을 수 있다. 껍질을 벗어나 얽매이지 않을 때, 참다운 자유와 행복을 맛볼 수 있다. 껍질이란 건 외형적 의미로는 의복이요, 내면적 의미로는 자기 포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옷을 입을 때 일기나 기후, 또 때와 장소에 맞지 않게 입으면 보기에도 아름답지 않거니와 본인 스스로도 많이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내면의 자기 포장 또한 옷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적절하면 그 아름다움이 굳이 애쓰지 않아도 말과 표정에서 절로 나타나지만 넘치면 가식이 된다. 가식은 본연의 모습과의 괴리다. 그 괴리가 크면 클수록 마음은 고단해진다. 왜냐하면, 가식이란 거짓이니까 말이다. 거짓은 거짓을 낳고, 그 거짓에 나를 맞추다 보면 진정한 나의 모습으로 돌아오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마치 먼 여행길에서 귀가를 하려면 그만큼 오랜 시간이 걸리듯이 말이다.

우리들이 갖고 있는 에너지에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 그 에너지를 내 모습으로부터 이탈했다가 회귀하는 무의미한 곳에 사용하기 보다, 거짓 없는 내 모습 그대로의 시점으로부터 나날이 성장하는 데에 쏟아봄은 어떨까? 껍질, 사실 좀 무겁기도 하쟎은가? 쓰잘데기 없이 말이다. 그 껍질을 훌훌 벗어 던진다고 생각하면 훨씬 가볍고 시원한 생각이 드는 게 필자만의 착각인지 모르겠다.

두 눈이 있어 아름다움을 볼 수 있고, 두 귀가 있어 감미로운 음악을 들을 수 있고, 두 손이 있어 부드러움을 만질 수 있으며, 두 발이 있어 자유스럽게 가고픈 곳 어디든 갈 수 있고, 가슴이 있어 기쁨과 슬픔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 나에게 주어진 일이 있으며,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날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며, 내가 갈 곳이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 하루하루의 삶의 여정에서 돌아오면 내 한 몸 쉴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것을, 날 반겨주는 소중한 이들이 많다는 것을 생각한다.

내가 누리는 것을 생각한다. 아침에 보는 햇살이 기분을 맑게 하며, 사랑의 인사로 하루를 시작하며, 아이들의 해맑은 미소에서 마음이 밝아질 수 있으니, 길을 걷다가도 향기로운 꽃들에 내 눈이 반짝이며, 한 줄의 글귀에 감명을 받으며, 우연히 듣는 음악에 지난 추억을 회상할 수 있으며, 위로의 한 마디에 우울한 기분을 가벼이 할 수 있으며, 보여주는 마음에 내 마음도 설렐 수 있다는 것을, 나에게 주어진 것들을 누리는 행복을 생각한다.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다는 것에, 건강한 모습으로, 뜨거운 가슴으로, 이 아름다운 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오늘도 감사하다는, 오늘이라는 좋은 날에 한 번 정도 자신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 있는 거울이 있으면 좋겠다. 부족했던 것들을 채워갈 수 있고, 아쉬웠던 것은 더 많이 후회하지 않도록, 그런 자신만이 간직하는 마음의 거울이 늘 곁에서 지켜주고 함께 해준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지치고 힘들어도 위안을 받을 수 있어 좋고, 슬프고 괴로워도 기쁘고 즐거웠던 일들 속에 미소를 머금을 수 있어 행복하듯이, 우리들의 마음도 늘 이렇게 하루의 시간들이 변화 속에 요동을 치면서도, 저물어 가는 길엔 늘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더할 것이다. 그러나 그 안타깝고 조급한 마음들을 모아서 다시금 아름다운 꿈으로 반죽하여 사랑으로 빚어내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의 행복은 멀리 있기만 한 건 아닐 것이다.

새내기 악마를 데리고, 담임 악마가 인간 세상으로 수학여행을 왔다. 담임 악마가 진중하게 하달했다. “인간은 영물이라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그리고 정히나 자신이 없거든 코를 이용해라. 먹거리는 냄새를 피우는 법이다.” 주의사항을 거듭 말했다. “과연 술 냄새를 따라가면 인간을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 그리고 어쩌다 마약 냄새를 찾아가면 그건 거저 주어오기만 하면 된다.” 그러다가 담임 악마가 갑자기 코를 싸맸다. 새내기 악마가 물어보았다. “왜 그러세요?” “인간들이 좋아하는 꽃 냄새가 난다. 그러나 우리한테는 악취야.”

새내기 악마 또한 코를 싸매 쥐며 말했다. “그러면 저걸 조심해야겠네요.” 담임 악마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저건 휘발성이기 때문이다.” “쉬 사라져버린다는 말인가요?” “그렇지, 공간도 시간도 잠시 적셨다가는 이내 물러난다.” 그런데 여유만만하던 담임 악마가 한 창문 밑을 지나면서 공포에 떠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냄새가 있지 않니?” “저는 모르겠는데요.”

“이 집에서는 지금 잘 익은, 사람의 품성 냄새가 나고 있다. 이 냄새는 공간과 시간에 구애받지 않으니 조심해야 한다.” “영원하다는 말인가요?” “그렇지, 이 냄새에 중독되어 전향한 너희 선배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담임 악마가 지나온 창문을 돌아보며 말했다. “인간들은 고기를 갈무리할 때는 소금을 쓰고, 양심을 갈무리할 때는 저 품성을 쓰고 있으니, 이 냄새가 있는 곳에는 얼씬도 말아라.”

양심을 갈무리 할 때 쓰는 품성이란 무엇일까? 잠시 재미있는 글을 떠올리면서 생각을 해 보았다. 소금은 음식을 상하지 않게 하는 방부제와 같은 역할을 한다. 우리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는 방부제, 그건 아마도 반성의 시간이 아닌가 싶다. 반성의 시간이 없다면나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것이고, 자신을 돌아봄에 게으르다 보면 부족하거나 그른 자신의 행위와 마음가짐에 개선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바쁜 일상이지만 하루 중 어느 시간을 정해서 잠시 숨고르기 하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꼭 마련해 보도록 해보자. 스스로에게 당당하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매일의 과정이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물론 필자도 그리하겠다는 다짐을 슬그머니 얹어본다. 아울러 삶의 목표를 설정해보자. 삶의 목표를 설정하려면 먼저 목표를 종이에 적어 본다. 단, 짧고 간명하게 적는다. 진정으로 원하는 바만 목표로 삼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현실적이되 낙관적으로 굴어야 한다.

그리고는 구체적으로 정한다. 또한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 그 후에는 관찰하고 검토하며 재조정한다. 그리고 목표를 향해 전력 질주하는 것이다. 목표 설정은 단연 결심이 먼저다. 처음 결심이 가장 중요하고, 그 결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계속해서 결심하고, 또 결심해야 한다. 말로, 글로, 생각으로... 목표 설정은 자기 안에 북극성을 갖는 것과 같다. 자기가 가는 방향을 잃지 않게 하니까 말이다. 잊어서는 안 될 삶의 중요한 팁이다.

사람에게는 다섯 가지의 나이가 있다고 한다. 우선은, 시간과 함께 먹는 달력의 나이다. 두 번째는, 건강 수준을 재는 생물학적 나이, 즉 세포 나이다. 세 번째로는, 지위, 서열의 사회적 나이를 말한다. 그리고 네 번째는, 대화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정신적 나이, 마지막으로, 지력을 재는 지성의 나이, 이렇게 다섯 가지다. 그런가 하면 ‘100년쯤 살아 봐야 인생이 어떻노라 말할 수 있겠지요.’ 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나이에 대한 시각은 다음과 같다 한다.

1세. 누구나 비슷하게 생긴 나이, 5세. 유치원 선생님을 신봉하는 나이, 19세. 어떤 영화도 볼 수 있는 나이, 36세. 절대 E.T. 생각은 못하는 나이, 44세. 약수터의 약수물도 믿지 않는 나이, 53세. 누구도 터프가이라는 말을 해주지 않는 나이, 65세. 긴 편지는 꼭 두 번쯤 읽어야 이해가 가는 나이, 87세. 유령을 봐도 놀라지 않는 나이, 93세. 한국말도 통역을 해주는 사람이 필요한 나이, 99세. 가끔 하나님과도 싸울 수 있는 나이, 100세. 인생의 과제를 다 하고 그냥 노는 나이라 했다 한다. 요즈음은 100세 시대라 했으니 아마도 100세에 해당하는 사람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사례라고도 하겠다.

아무튼 나이 값 한다는 것이 결국은 사람 값 한다는 건데 “나는 과연 내 나이에 걸맞게 살아가고 있을까?” 혹은 “시간과 함께 흘러가버리는 달력의 나이만 먹은 것이 아닌지?” 자문해보고, 이 물음에 “그렇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면 그는 사람 값을 하며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텐데, 과연 필자는 지금 몇 살을 살고 있을까?

어느 학교에서 생물시간에 학생이 물었다. “선생님, 박테리아가 무엇입니까? 박테리아에 대해 좀 말씀해 주세요.” 갑자기 박테리아 질문을 받은 선생님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엉겹결에 내일 얘기해 주겠다고 하고선 집에 돌아가서 책을 뒤졌다. 하지만 박테리아에 대해 잘 설명해놓은 책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선생님은 밤새 혼자 끙끙 앓고 있었다. 한 편, 학생은 은근히 신이 났다. 그 학생의 아버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동경대학의 생물학교수였다.

집에서 아버지가 박테리아에 대해 동료교수와 얘기하시는 걸 얼핏 들었던지라 은근히 자기 실력을 학생들에게 자랑해보고 싶은 심정에 한 질문이었던 것이다. 집에 돌아온 그 아이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박테리아에 대해 선생님께 물었는데 대답을 못하시던데요. 내일 알려주겠다고 하셨는데 아버지가 좀 더 자세히 가르쳐 주세요.” 아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아버지는 고개를 가로저으셨다.

“선생님이 모르시는 건 나도 모른단다. 난 박테리아란 이름만 들었지 사실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단다.” 다음날 아침, 아이가 학교에 갈 때 아버지는 선생님께 전해드리라며 하얀 봉투를 하나 주셨다. 그 봉투 속에는 박테리아에 관한 모든 정보가 들어 있었다. 학교에서 봉투를 받아든 선생님은 학부모의 사랑과 배려에 감탄했고, 그 아버지가 주신 지식으로 학생들에게 멋진 강의를 할 수가 있었다. 별거 아니지만 일본에서 있었던 실화다. 좋은 세월인지 나쁜 세월인지는 모르겠다만 점점 수직의 관계가 무너져가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당근과 달걀, 그리고 커피가 있다. 물이 담긴 세 개의 냄비를 불 위에 올려놓는다. 첫 번째 냄비에 당근을, 두 번째 냄비에는 계란을 넣고, 세 번째 냄비에는 커피를 넣는다. 이 세 개의 냄비를 15분 동안 끓인다. 이제 우리가 넣은 것들을 꺼내 본다. 당근은 들어갈 때 딱딱했지만 물컹물컹해졌고, 계란은 들어가기 전에 부드러웠지만 단단해졌다. 그러나 커피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대신 물은 색을 갖게 되었고, 또한 좋은 향이 난다.

삶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인생은 언제나 쉽지만은 않다. 인생이 언제나 편할 순 없다. 때론 너무 힘들기까지 한다. 결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들도 내가 바라는 것처럼 나를 대하지 않는다. 열심히 일하지만 대가는 항상 작은 것 같다. 세 개의 냄비를 생각해 보자. 끓는 물은 우리 인생의 고난과도 같다. 우리는 당근처럼 될 수 있다. 자신감 넘치고 힘차게 들어가지만 나올 때는 물렁하고 유약해진다. 너무 힘들어 지치고 희망을 잃고, 결국 포기한다. 맞서 싸울 투지를 잃게 된다. 당근처럼 되지 말자.

우리는 달걀처럼 될 수도 있다. 시작할 땐 부드럽고 감성적이지만 결국 무뚝뚝하고 무감각해진다. 서로를 헐뜯고 우리 자신도 미워하고, 감정이 무딘 사람이 되어간다. 따뜻한 감정은 온 데 간 데 없고, 결국 인생의 씁쓸함만이 남는다. 달걀처럼 되지도 말자. 그리고 우리는 커피처럼 될 수 있다. 물은 커피가루를 변화시키지 않는다. 커피가루가 물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물은 커피로 인해 변화한다.

보고, 향을 맡고, 마셔보자. 뜨거울수록 맛은 더 좋아진다. 우리는 커피같이 될 수 있다. 우리가 겪는 시련을 통해 더 나아질 수 있다. 우리는 항상 새로운 것을 배운다. 새로운 지식, 새로운 기술, 새로운 능력, 우리는 경험 속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더 좋은 환경과 성공을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하는 것에 신념을 가지고 포기하지 말며, 끈기 있게 계속 밀고 나가야 한다. 우리가 겪는 시련은 우리가 더 나아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당근인가? 달걀인가? 커피인가? 그저, 비우고 고요히 살아가자. 캄캄한 밤 하늘의 별을 헤며, 반딧불 벗 삼아 막걸리 한 잔, 소쩍새 울음소리 자장가 삼아 잠이 들어도 마음 편하면 그만이다. 가진 것 없는 사람이나, 휘황찬란한 가진 것 많은 사람이나, 옷 입고, 잠 자고, 깨고, 술 마시고, 하루 세 끼 먹는 것도 마찬가지이며, 늙고 병들어 북망산 갈 때 빈 손 쥐고 가는 것도 똑같지 않던가?

“사랑을 노크합니다. 똑똑똑, 들어가도 될까요?” “네, 들어오세요.” “아이 뜨거워, 얼굴도 못 들이밀겠는데요. 좀 식혀 주실 수 없어요?” “식히면 사랑이 아니라 무관심인데요. 그럼 그 집으로나 가보세요.” “아닙니다. 제가 찾는 것은 사랑인데요.” “그럼 들어오세요. 얼굴 델 걱정하는 사람이 어디 사랑의 집에서 사시겠어요?” “아니예요. 화상을 입으면서까지 들어가서 살 수는 없지요.”

“아름다움을 노크합니다. 들어가도 좋을까요?” “네, 환영합니다. 어서 오세요.” “아, 어지러워, 왜 이렇게 현기증이 나지요? 속이 메스꺼운데요. 이 집은 줄곧 이렇습니까?” “내내 그렇지는 않지만 여긴 고통거리가 많아요, 아름다움을 소유하려면 여러 가지 괴로움을 참아야 하거든요.” “제일 힘든 것이 무언가요?” “수명이 짧다는 것이죠, 아름다움을 완전히 소유했다고 믿는 그 순간에 그 아름다움은 사라지지요.” “그 덧없는 순간을 위해 갖은 어려움을 다 겪어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네, 바로 그겁니다.” “실컷 애써서 얻은 것을 이내 놓친다는 것은 너무 억울한 노릇입니다. 여기도 제가 머물 곳은 아닌가 봅니다.”

“그리움을 노크합니다. 들어가도 좋을까요?” “네, 어서 오세요.” “어라, 왜 이렇게 추워요?
코만 넣어보았는데 이처럼 코 끝이 시리니 들어가면 얼어 죽겠어요.” “그리움의 집은 집이 항상 비어있어 쓸쓸하고 춥습니다. 당연하잖아요? 보고 싶어 하고 사모하는 정을 가지길 원한다면 고독을 견디고 언제나 기다릴 줄 알아야 되지요.” “미안하지만 저와는 안 맞네요. 사양하겠습니다.”

“기쁨을 노크합니다. 들어가도 좋을까요?” “어서 오세요.” “아니 이 소리가 뭐지요? 이 소리는 울음소리 아녜요?” “슬픔 뒤에 오는 것이 기쁨이니까요.” “기쁨 하나를 얻으려고 노상 울어야 한단 말인가요?” “기쁨이 얼마나 소중한 건데요. 진정한 기쁨을 누리려면 진실한 의미의 슬픔을 체험한 자라야 합니다.” “그건 너무 어렵네요.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부유함을 노크합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어서 들어오세요.” “부(富)를 누리고 싶어서 왔는데 무슨 조건이 없습니까?” “물론 있죠, 우선 가난을 겪으셔야 합니다.” “어떻게요?” “굶고, 헐벗고, 목마르고...” “배를 채우러 왔는데 배고픈 연습을 하라니 가당치도 않아요. 그냥 문 닫으세요.”

“건강을 노크합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대환영입니다. 들어오십시오.” “저기 컴컴한 구석에 누워 있는 그림자들은 뭔가요?” “앓는 사람들이예요.” “이 집도 입장이 까다로운가요?” “까다롭긴요! 귀한 건강을 누리고 싶은 사람이 어떻게 병치레를 안 하고 덥썩 건강을 얻을 수 있겠어요? 가벼운 감기부터 불치의 병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앓아보게 하는 집이지요.” “말만 들어도 끔찍하니 문 닫아 걸으세요.”

“자 어디로 간다? 과정이 천편일률이잖은가 말야, 제기랄... 남이 가진 것을 보면 부럽긴 했는데, 그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이 아니네, 나선 김에 한 군데만 더 가 봐야지. 행복을 노크합니다.” “네네네. 들어오시죠. 얼마 만에 들어보는 노크인지요!” “이 집은 방문객이 없는가 보죠?” “워낙 어려운 관문이니까요.” “어렵다니요?” “여기는 갖은 시련, 역경, 불행을 한 단계 씩 모조리 경험해 보는 집이랍니다. 참된 행복을 구하고 싶은 사람이 인생의 이와 같은 질곡을 안 거치고 정상에 오를 수 있나요?”

‘지금은 우리 마주 보아야 할 시간’ 중에서 저자 ‘오혜령’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무엇이든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세상에서 원하는 것들을 내 것으로 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치루어야 하고, 어쩌면 그것이 우리 삶을 굳건히 지탱할 수 있도록 하는 기초공사가 되어지는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또한, 얻어진 것의 가치를 귀히 여길 수 있도록 하지 않을까요? 귀히 여기는 마음은 그 좋은 것들을 오래 우리 곁에 머물게 할 거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날을 시작하며 혹여라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언젠가 어느 책에서 읽었던 글이 떠오른다. “고통은 살아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한 자유이다.” 늦은 장마비가 제법 자주 내리는 이즈막이다. 이번 주도 비가 더러 올 거라고 한다. 오락 가락, 습도도 높고, 기온도 높고, 불쾌지수가 높아지는 기후다. 하지만 그럴수록 마인드컨트롤, 기분만이라도 상큼하게, 내내 일 진행 잘 하면서 즐거움으로 보내는 오늘 하루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의 날들이 어떤 건지, 아직도 난 잘은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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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난
아는 거 보다 모르는 게 많아
훨씬 더, 훨씬 더

해서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일 많지만
조바심하거나 서두르지는 않아

때가 되면 저절로 알게 될 건데,
시절 한참 지나가
흔적조차 보이지 않을지라도

정작 마음으로 눈 떠
추억만 갖고도 감격에 겨워
함빡 미소지을 그날 올 테니,

아침 햇살에 이슬은
그냥 사라지는 게 아니라
촉촉한 숨결로 풀잎 스며들어

빛 좋게 피어나는 바람결에
향기 흩어 뿌리는 매듭이었음을
이슬 스며든 한참 뒤에야
눈치챘듯이,

깊은 골짝에 물살은
그냥 돌아치는 게 아니라
졸졸졸 소리로 구비 흘러들어

꿈 곱게 살아나는 여울목에
생명 실어 보내는 몸짓이었음을
물살 흘러간 한참 뒤에야
발견했듯이,

계절 흔적에 청춘은
그냥 늙어지는 게 아니라
곰삭은 맛으로 세월 총총박혀

한 평생 덧칠해온 자화상에
쉼표 찍어 누르는 보람이었음을
청춘 스러진 한참 뒤에는
알게되리니, 필경

아직도 난
산다는 게 뭔지, 그게 어떤 건지
켜켜이 모르는 일 천지이지만

그래도 난
마음에다 눈 떠 오늘 일들 전부
새겨갈 거야
하나 씩, 하나 씩

하나 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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