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네번째 가상詩集입니다.

2012년 봄부터 씌여진 詩들입니다.
實驗詩적인 성격의 習作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오늘까지 계속 이어져오는 역사의 章입니다.

처음 詩人의 길에 入門한 이래로
이제껏 40년 이상을 지어온 詩이지만 아직도
정확한 詩의 정의를 내리지 못한 채,

판도라의 상자를 가슴에 품어안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풍운아로 떠돌며
詩의 본질을 찾아 헤매고 있는
詩人 林森의 애환이 드러나 있습니다.

林森의 고행은 그래서
지금도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그의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쭈욱 ~~

詩人의 멍에를 天刑으로 걸머지고 있는 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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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애인의 여름나기 *



시작노트

" 장애인의 여름나기 " 詩作 note

여름이 완전히 가버렸다. 물론 추석절기도 지난 마당에 새삼 여름 운운하는 것이 좀 생뚱맞기는 하다만 올 여름이 어디 보통내기였었던가? 유난히도 지악스럽고 질겨빠지던 폭염과 열대야의 망령은 아마도 세월 한참 지나도 쉽사리 잊혀지지는 않을 게다. 허기사 내년 여름이, 아니면 그 다음 해의 또 다른 무차별적인 여름이 다시 오지 말란 법이 없거늘 미리 속단하여 올 여름이 역사상 가장 최악이었다느니, 기록을 기록적으로 경신하였다느니 하면서 입방정 떨 일은 아니다.

애저녁에 약해빠진 인간들은, 그러면서도 세상 최고의 존재이며 만물의 영장이라고 거들먹거리는 볼썽사나운 우리네들은. 그냥 오는 여름 조신하게 맞아들이고, 가는 여름 반가이 보내면 그 뿐이다. 도대체가 역사를 바꿀 힘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소유치 못하였거늘, 정작 여름을 극복한다느니, 아니면 여름을 정복한다느니 하는 가당치 않은 발상은 집어치우고, 여름살이나 혹은 이제 다시 찾아준 가을살이나마 더없이 사람다운 삶으로 장식해갈 일이다.

어렵사리 맞이한 결실의 계절 가을, 이 축복의 절기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면서 필자는 문득 지난 여름의 한 단상을 떠올린다. 그냥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상이려니 하고 넘기기에는 웬지 씁쓸하고, 사람이라는 사실이 남사스러울 정도로 뒷 맛이 찝찝하고 뒷골이 땡기는 경험이었기에, 몇 날을 두고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잔상이 필자의 꿈자리를 뒤숭숭하게 괴롭혔었다. 사건의 본말은 차치하고라도, 인정이라는 가장 원초적이며 엄연한 본능조차 없어져가는 현 실태가 그렇게 서글플 수가 없다.

지하철을 타고 가노라면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 중에 하나가, 소위 잡상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호객행위와, 장애인들의 하소연을 겸한 구걸행위다. 때로는 시답잖은 상품 선전에 일절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관심조차 적선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지만, 어떤 때는 도가 지나친 고성이나 반강압적인 권유에 눈살을 찌푸릴 때도 있긴 하다. 특히 유인물이나 껌 등을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객실 내를 순회하는 경우도 있어서 부담스러울 때가 간혹 있다.

허기사 필자도 더러는 조금 관심을 기울이며 도움을 주거나, 별로 필요치는 않더라도 웬지 마음이 동해 상품을 구입하는 경우도 간혹 있었는지라, 그런 비일비재한 상황들은 그저 사람 사는 사회에서 당연히 벌어지는 지하철 내의 풍속도려니 여기며 크게 주의를 집중하지는 않는 편이다. 그런데 그날은 예기치 않게 보게 된 상황이 너무나도 당황할 수밖에 없는 큰 일이었다. 조금은 소란스러운 공간이라서 이전의 사정은 잘 파악이 안 되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우당탕하며 큰 소리가 나면서 시각장애인 한 사람이 차바닥에 떠밀려 넘어지는 것이었다.

아마도 사연을 적은 작은 종이조각을 사람들에게 돌리면서 볼펜을 팔고 있었나본데, 지팡이를 짚고 더듬거리면서 사람들 사이를 걸어가다가 찰나 중심을 잃고 곁에 있던 젊은 여성을 건드린 듯 싶었다. 그러자 그 여성은 초로의 장애인을 향해 욕설을 퍼부으면서 갑자기 힘껏 떠밀어버린 것이다. “이런, 눈도 멀은 주제에 성희롱을 하려구 들어? 재수없게...” 순간, 시끌벅적하던 객실은 갑자기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지며, 영문을 몰라 어안이 벙벙해진 승객들이 동시에 하나의 광경을 목도하게 되었다.

쓰러진 장애인은 벌벌 떨면서 다시 일어나려고 발버둥을 치고, 떨어뜨린 볼펜들은 천지사방으로 흩어져 굴러다니고, 종이조각들도 이리저리 흩날리게 되는 일은 순식간에 벌어진 결과였다. 분기탱천한 여성은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삿대질을 해가며 호령을 하고 있는데, 순식간에 갑자기 벌어진 사건인지라 누구라도 제지할 여유가 없었다. 잠시 후에 경황이 없던 중에도 몇몇 승객들이 솔선수범하며 흩어진 잔재물들을 줍기 시작했고, 어떤 노인은 그 여성을 만류하며 달랬다. 필자는 얼떨결에 장애인에게 다가가 붙잡아 일으키면서, 조심스레 다친 데는 없느냐고 물었다.

감긴 눈으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죄송합니다.”만 연발하는 그를 힘겹게 자리에 앉히고는 진정을 시켰다. 사람들이 주워온 볼펜을 필자의 가방에 쓸어 담고, 대신 오만원 짜리 한 장 꺼내어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극구 거절하는 걸 억지로 달래다가 도무지 진정을 못하기에 다음 정류장에서 같이 하차하였다. 마침 구내에 작은 매점이 있어서 음료수를 사서 함께 마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필자가 가고자 하는 약속시간에 한참을 늦게 되었지만, 연락처 번호를 몇 번을 소리내서 암송하게 하고는, 이내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렸다.

물론 그 사람에게서는 그 뒤 다른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지하철을 탈 때마다 혹시나 하고 두리번거리면서, 마주치지는 않을까 하고 눈여겨 보았지만 한 번도 더 조우할 수는 없었다. 졸지에 식구 수대로 볼펜을 한 주먹씩 선물받게 만든 인연은 아마도 그것으로 다 였는가 보다. 바라기에는 그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아갈지는 모르지만, 부디 세상의 인심이 그렇게 야박하지만은 않다며 스스로 자위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주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그 더운 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볼펜 한 자루라도 팔려고 애를 쓰던 그 모습이 지금까지도 눈에 선해, 지난 여름의 무더위를 잊지 못하게 한다. 도대체 장애인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디 한 군데 쯤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것이 눈에 보이든 안보이든, 겉으로 드러나 있든지, 속으로 감추어져 있든지 우리는 누구나 장애인이다. 피차일반이라는 말이다. 기왕지사 동병상린의 처지라면 누가 누구를 손가락질하고, 누가 누구를 일컬어 장애인이라는 명찰을 달아버리려고 할 수 있겠는가? 세상 그렇게 살지 말자.

차가운 겨울 밤, 시골 성당의 신부님이 성당을 청소하고 잠자리에 들려 할 때 누군가 성당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주니 경찰들이 부랑자 한 명을 붙잡아 성당 안으로 들어왔다. 신부님은 부랑자의 얼굴이 낯이 익어 자세히 살펴보니, 어젯 밤 추운 날씨에 잠자리를 마련하지 못해 곤란해 하기에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성당에서 하루 지낼 수 있게 배려해 주었던 남자였다. 그런데 경찰들이 그 남자의 배낭을 열어보니 성당에서 사용하는 은촛대가 들어있었다.

경찰은 신부님에게 물었다. “신부님, 이 남자가 성당의 은촛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수상해서 체포했습니다. 자기 말로는 신부님이 선물한 것이라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 어디 있습니까?” 신부님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말했다. “맞습니다. 제가 그에게 선물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촛대만 가져간 겁니까? 제가 은쟁반도 같이 드렸을 텐데요. 당신은 이런 늙은 신부의 작은 호의에도 너무 미안해하는 착한 사람이군요.”

아무렇지도 않게 은쟁반까지 내주는 신부님의 모습에 경찰들은 미심쩍은 얼굴로 그냥 돌아갔다. 경찰들이 사라지자 남자는 바닥에 엎드려 울면서 신부님에게 사죄했다. 사실 남자는 신부님에게 많은 호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은촛대를 훔쳐 달아난 것이었다. 신부님은 빙그레 웃으며 남자의 배낭에 은쟁반마저 넣어주었다. ‘프랑스’의 소설가 ‘빅토르 위고’의 장편소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과 ‘미리엘 신부’의 이야기다. 우리가 다 아는 소설이다.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라.” 성직자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십계명 중 하나다. 하지만 신부님은 한 사람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거짓 증언을 했다. 만약에 신부님이 “저 자는 도둑놈입니다.”라고 차가운 진실을 말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엄격하고 차가운 진실보다는 때로는 따뜻한 용서와 부드러운 마음으로 잘못을 받아줄 때 사람은 진심으로 변화하고 뉘우치는 법이다. 용서는 과거를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러나 미래를 푼푼하게 만든다. 그게 진리다.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지니고 있는 재능이 뛰어나다고 해서 세상의 진실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다. 순리라는 것은 물 흐르는 대로 같이 흘러가는 처세에서 기인한다. 구태여 드러내서 원칙과 규율을 강조하려 할 이유도, 틀에 맞는 격식이나 조건을 강조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그냥 상황에 맞게, 그리고 보통 사람들의 생각에 거슬리지 않게, 자연스러운 생각과 행동으로 사람과의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제대로 된 지침이다.

고대 중국 ‘당나라’ 때 활동한 이후, 동서양의 모든 문인이 칭송하는 천재 시인 ‘이태백’. 그런 그도 젊은 시절에는 자신이 가진 재능의 한계에 절망하고, 붓을 꺾고 유랑을 할 때가 있었다. 그렇게 절필을 선언하고 자신과 세상을 비웃으며 유랑하던 어느 날, 산 중턱에 있는 한 노인의 오두막에 하룻밤 묵게 되었다. 과묵한 노인과 저녁을 먹은 이태백이 잠자리에 들려는데, 노인은 커다란 쇠절구를 꺼내더니 숫돌에 갈기 시작했다.

호기심이 생긴 이태백이 물었다. “어르신. 왜 그 커다란 쇠절구를 숫돌에 갈고 있는 겁니까?” 그러자 노인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네. 바늘을 만들려고 합니다.” 이태백은 노인의 행동에 할 말을 잃었다. 저 쇠절구가 바늘이 될 때까지 갈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 지 상상도 되지 않았기에, 무익하고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노인은 묵묵히 쇠절구를 갈았다. 아무런 의심도 회의도 없이 고고한 모습으로 집중하면서 쇠절구를 가는 노인의 모습에 흠뻑 빠져들어 이태백은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이태백은 깨달았다. ‘하나의 재능이 있다 해도 아홉의 노력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다.’ 그렇게 노력의 중요함을 깨달은 이태백은 역사에 길이 남는 시인이 되었다. 어떤 종류의 성취든 자신이 목표한 것에 큰 성과를 올린 사람은 재능과 행운과 노력을 통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 모두에게 재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오히려 큰 불행과 실패를 안고 살아가던 성공자들도 꽤나 많다.

성공한 사람들의 확실한 공통점은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 우직하고 성실한 노력을 했다는 것이다. 재능이나 행운보다, 노력이야말로 성공의 필수 조건이다. “나는 똑똑한 것이 아니다. 그저 문제를 더 오랫동안 연구할 뿐이다.” 라고 말한 ‘알버트 아인슈타인’처럼 우리는 묵묵하게 자신의 할 일을 하면서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더 가치있고 소중한 삶의 얼굴을 대면하는 행운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장애인이라 여기고,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하면서 한 층 더 노력하는 자세를 갖는다면 아마도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으리라 여긴다.

조선말 무신이자 친일파 ‘우범선’의 아들 ‘우장춘’. 아버지의 원죄를 짊어지고, 일본에서는 조선인, 조선에서는 민족반역자의 아들로 비난받는 삶을 살아야 했던 비운의 천재였다. 그렇지만 언제나 좌절하지 않고 노력을 기울인 결과 ‘종의 합성’이라는 논문으로 ‘다윈’의 ‘진화론’을 수정하게 하는 엄청난 업적을 이루었다. 광복 후 식량난에 허덕이던 대한민국이 도움을 청하자 우장춘 박사는 남은 일생을 조국을 위해 희생하고자 했다.

‘제주 감귤’과 ‘강원도 감자’를 정착시키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배추와 무의 품종개량, 우리 땅에 맞도록 개량된 쌀, 과일 품종의 정착과 대량생산 기술개발, 씨앗의 생명력 강화 개량 등... 그렇게 우장춘 박사는 죽는 날까지 어깨를 짓누르던 아버지의 그릇된 그림자를 어떻게든 지우고자 사력을 다했다. 그렇게 9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8년 우장춘 박사가 사망하던 그 해 병상에 있는 그에게 ‘대한민국 문화 포장’을 수여했다.

우장춘 박사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조국이 드디어 나를 인정했다!” 우장춘 박사가 한국으로 돌아가려 할 때, 뛰어난 인재를 잃고 싶지 않던 일본 정부는 우장춘 박사를 감옥에 가두려는 초강수도 두었지만 스스로 조선인 수용소로 들어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우장춘 박사는 가족을 위해 쓰라고 대한민국에서 준 돈까지도 우량종자를 사버리는 데 사용했다. 자신의 운명을 묶은 끈을 풀기 위해, 그리고 조국을 위해 최선을 다한 우장춘 박사의 그 드높은 의기를 기리고 싶다. 길가의 민들레는 밟혀도 꽃을 피우기 마련이다.

필자가 참으로 존경하고 좋아하는 친구같은 선배님 한 분이 계시다. 이름을 대면 ‘캐나다 벤쿠버’ 한인사회에서는 모두가 아는 분이다. 그 분이 젊은 시절에는 다방 DJ를 했다고 한다. 본인은 그 시절 아가씨들에게 겁나게 인기가 많았다고 하는데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객관적으로 그리 잘생긴 얼굴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끔 DJ를 보면서 날렸던 멘트를 당시 버전으로 우리에게 선보이곤 한다. 입담이 워낙 좋은 분이라 우리는 늘 배를 잡고 웃곤 한다.

목소리를 착~ 깔아서 이랬다고 한다. “꽃은 피어도 소리가 없고, 사내는 울어도 눈물이 없고, 사랑은 불타도 연기가 없습니다. 오늘의 노래 잔자안히 흘러나갑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러브 미 텐더’입니다.” 그러면서 음악이 잔잔하게 흘러나오면 동네 아가씨들이 그냥 ‘껌뻑’ 죽었다고 한다. 그것을 확인할 방법은 없고, 그랬다고 하니 그냥 믿어야 한다. 필자에게는 하늘같은 선배님이기 때문이다.

일전에 그 선배님과 대화를 하다가 굽은 소나무 얘기가 나왔다. 자식들을 좋은 대학에 진학시켜서 큰 아들은 현재 미국에서 대학교수를 하고 있고, 작은 아들은 서울에서 대기업의 임원으로 있는데, 정작 그 어머니는 여수에서 혼자 쓸쓸히 지내고 계시는 분에 관련된 대화를 하다가 그 얘기가 나왔다. 그래서 자식을 아주 잘 키우면 국가의 자식이 되고, 그 다음으로 잘 키우면 장모의 자식이 되고, 적당히 키워야 내 자식이 된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니 자식 중에 한 명 정도는 지방의 공고에 보내서 적당히 못나게 커야 내 가까이에 두고 살게 된다는 말도 나왔다.

웃자고 하는 얘기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틀린 얘기는 아닌 것 같다. 그래야 집에 하수도가 막혀도 “얘야! 하수도가 막혔다. 얼른 와서 해결 좀 해라.”하고 편하게 부를 수 있고, 방 안의 전구를 바꿀 때도 “얘야! 얼른 와서 전구 좀 바꿔라.”하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수도가 막혔다고, 전구가 나갔다고, 미국에 있는 아들을 부를 수 없고 서울에 있는 아들을 부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일 년에 겨우 한두 번 볼까 말까하는 아들이 내 아들이라고 할 수가 없고, 평생에 한두 번 겨우 볼 수 있으며, 사진을 통해서나 가까스로 만날 수 있는 손자들이 내 손자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겨울 추워져서야 소나무·잣나무가 쉬이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는 글이 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나오는 말이다. 옛 어른들도 못난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가르치셨다.

무릎 꿇고 앉아 산을 지키는 못난 소나무. 그 못난 소나무가 부모의 산소를 지키고, 선산을 지키고, 고향을 지키는 것이다. 같은 소나무지만 토질이 좋고 비바람을 덜 받아 곧고 수려하게 자란 소나무는 사람들이 재목으로 쓰기 위해 베어가 버린다. 이리저리 가공되고 변형되어서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나머지도 화목으로 소멸되어진다. 또한 멋지고 괴이하면서도 특이한 소나무는 분재용으로 송두리째 뽑아가 버린다.

그러나 같은 땅이라도 척박한 곳에 뿌리를 내린 못난 소나무는 모진 고생을 하면서 자라야 한다. 또 크게 자란다고 해도 동량이 되지 못하니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아무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그 못난 소나무는 산에 남아 산을 지키게 된다. 그렇게 산을 지키는 못난 소나무는 산을 지키면서 씨를 뿌려 자손을 번성케 하고 모진 재해에도 산이 훼손되지 않도록 산을 보존한다. 결국 잘난 소나무가 멋지게 자라서 재목이 될 수 있는 것도 못난 소나무가 산을 정성스럽게 지켜준 덕분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이 못난 소나무를 업신여기는 경향들이 없지 않다. 서로가 못난 소나무이면서, 너는 나를 우습게 알고, 나는 너를 우습게 생각한다. 돌아보면 실상 지금까지 우리가 그러했지 않은가? 서로 힐난하고, 서로 깎아 내리고, 잘난 꼴은 못 보고 말이다. 그리고는 잘난 소나무만 바라보며 그를 우러러본다. 우리 대부분은 못난 소나무다. 우리 자식들 대부분도 못난 소나무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 못난 소나무가 우리에게 효도하고 우리의 산소를 지키고 우리의 고향을 지킬 것이다. 그래서 도시의 교육정책도 못난 소나무에게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잘난 소나무는 잘난 소나무대로 열심히 키워야 하겠지만 평생 동안 고향을 지키게 될 못난 소나무들을 우리가 쉽게 생각하고 소외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말은 자식이 잘되면 고마운 일이지만, 자식이 평범하게 성장하더라도 구박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다. 오히려 더 정성스럽게 키워야 한다는 얘기다.

이 아이가 결국은 내 곁에 오래남아 막힌 하수구를 뚫어주고, 전구를 바꿔주고, 내가 아프면 나를 업고 병원으로 달려갈 자식이기 때문이다. 못난 소나무도 함께 모이면 울창한 숲이 된다. 서로 지지하고 응원하는 못난 소나무가 바로 우리였으면 좋겠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자신의 못난 점을 사랑하고 감싸주듯이 남의 약점도, 다른 사람의 장애도 인정하고 보듬어주는 아량과 사랑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하겠다.

지금 다시금 우리에게 높푸른 하늘과 선선한 바람과 청량한 공기로 찾아준 이 가을에, 우리는 우리를 못견디게 괴롭혔던 여름의 기억을 망각하지 말고, 다음에 다시 올 여름을 대비하는 기반으로, 그 여름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는 디딤돌로 삼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앞에 놓여진 가을을 잘 살자. 가을을 좀 더 가을스럽게, 짧고도 아쉬운 계절이니만큼 귀하디 귀한 보옥같이 어루만지며, 아픔을, 슬픔을 함께 나누는 가을의 이야기를 이제부터 써내려가자.


" 장애인의 여름나기 " 詩作 note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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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입니다
눈 있으나 세상 안보니 곧 시각장애인입니다

매 해 여름 이맘 때면
깊은 고민 뜨거워져
종종 지하철에 오르곤 합니다

열어젖힌 문틈
스스로는 치유하지 못해도 짐짓
손부채질에 밀려나는
하모니카 소리의 여운, 여운, 여운

아픈 흔적으로 겹겹이 쏘아보던 시선
들입따 엉켜버리고,
양심의 울림은 아니었는지
정작 귀에 들려지는 건 허무일 뿐입니다

반복되는 계이름
도,레,미,파,솔,라,시,도....

이골난 동냥질에
멸시 한 냥 적선받고는 돌아앉으니
주머니 속에서 꿈틀 -
신경세포 깊숙히 침투하는
암의 덩어리

묵묵히 일상 도닥이다가
겸손한 동행인 양
방부처리한 양심만 모아
진실의 수거함에 집어넣는 중,

이젠 더 이상 지하철은 안 탈지 모릅니다
우리 시절 중에서 여름
아주 사라진다면 또 몰라도

위아래로 대책없이 흐르는 건
물 뿐인 것을,
깜냥껏 세월 얹어본들
닫힌 눈에 무어는 제대로 보여질까요 ?

낙화로 분분히 날리는 삶이래봤자
돌고 도는 계절,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닙디다요

어차피 장애인에게 축복은 없습니다
애당초 시각장애인에게 여름은 없습니다
어처구니 없게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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