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15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네번째 가상詩集입니다.

2012년 봄부터 씌여진 詩들입니다.
實驗詩적인 성격의 習作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오늘까지 계속 이어져오는 역사의 章입니다.

처음 詩人의 길에 入門한 이래로
이제껏 40년 이상을 지어온 詩이지만 아직도
정확한 詩의 정의를 내리지 못한 채,

판도라의 상자를 가슴에 품어안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풍운아로 떠돌며
詩의 본질을 찾아 헤매고 있는
詩人 林森의 애환이 드러나 있습니다.

林森의 고행은 그래서
지금도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그의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쭈욱 ~~

詩人의 멍에를 天刑으로 걸머지고 있는 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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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산 그리움 *



시작노트

" 겨울산 그리움 " 詩作 note

지난달 말에 개봉한 영화 ‘가버나움’이 1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이 영화는 출생 기록조차 없이 살아온, 어쩌면 12살일 소년 ‘자인’이 부모를 고소하고, 온 세상의 관심과 응원을 받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관객들의 응원 속에 10만 관객을 돌파한 것은 비전문 배우들의 진정성 있는 연기 덕분이다. 자인 역을 맡아 열연을 펼친 ‘자인 알 라피아’는 시장에서 배달 일을 하던 시리아 난민 소년이었고, ‘라힐’ 역과 ‘요나스’ 역을 맡은 배우들은 실제 불법 체류자로, 모든 배우가 자신들의 삶을 연기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앞서 ‘나딘 라바키’ 감독은 ‘칸영화제’의 ‘심사위원상’을 수상하며 “영화의 힘을 진심으로 믿는다”라면서, “영화란 단지 개봉하기 위해서 꿈꾸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게 하려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지금껏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말하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하나같이 “아동 인권, 난민, 불법 체류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봤다”며 영화에 응원을 보냈다.

이런 응원에 힘입어 국내 ‘가버나움 프로젝트’ 기부도 결실을 봤다. 가버나움 제작진은 영화에 출연한 아이들과 가족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가버나움 재단’을 설립해 가버나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를 통해 자인 알 라피아 등 영화에 출연한 어린이들, 그들의 형제자매까지 학교에 다니게 됐다. 국내에서는 지난달 31일까지 1차 모금액 85만7천900원이 모여 1천엔, 6달러와 합하여 자인 알 라피아에게 전달했다. 2차 모금액 70만1천원과 영화 흥행 수익금 일부도 가버나움 재단에 기부된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암울한 주인공들과 레바논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바닥까지 보여준다. 보고 있으면 정말 숨이 막힐 정도로.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 빛이나 색깔을 정말 잘 사용하여 감정의 완급을 조절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처한 현실은 어두운 조명이나 색으로 했다면, 집 밖의 새로운 세계라 할 수 있는 놀이공원은 마치 그곳이 세상의 낙원인 것처럼 아름답게 밝은 색깔과 조명을 입혀준다.

영화의 첫 장면은 레바논 빈민가의 어린이들의 열악한 현실, 이후에는 마치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래를 내려보는 것처럼 보이는 처참한 빈민 도시의 실체이다. 이 영화의 얼개를 보면 여러 차례의 법정 장면이 나오고, 왜 법정에 서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가 뒤이어 나오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많은 우여곡절과 사연을 반복하게 되지만, 그 많은 것들을 다 체험처럼 스스로 알아가게 만든다. 그리고 영화의 안과 밖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지옥 같은 가버나움에서 마지막엔 결국 작은 희망을 보게 되면서 대미를 장식한다.

뜻밖에도 사회적으로 잔잔하면서도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이 영화는 빈민층의 현실과 어린아이들의 생활들을 단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영화다. 이 영화 안에서의 모든 장면들은 빈민층의 현실과 맞닿아 있으며, 여러 사회문제가 영화 내에서 큰 요소로 들어가 있다. 그렇기에 마냥 밝은 영화일 수가 없다. 굉장히 창백한 영화 안에서의 사건들은 결말부에 이르러 우리에게 큰 메시지를 전달하고, 그 메시지에 우리는 설득당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왜 이 메시지에 설득당할 수밖에 없을까?

먼저, 자인을 바라보는 부모의 시선부터 답답하다. 이 현실을 만든 것은 자인이 아닌 데도 불구, 그들 역시 힘들기에 자인의 입장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고 힘든 현실을 고려하지 않으며, 자인의 언행에 문제가 있다는 태도로 일관한다. 그런가 하면 현재의 자인이 겪고 있는 상황과 미래의 자인의 상황으로 보이는 법정 재판 장면이 이야기 흐름 중간중간에 주기적으로 비치며, 자인이 누군가를 칼로 찔렀다는 내용과 부모를 고소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러한 기법은 결국 자인의 삶이 어떻게 망가졌는지에 대한 암시와 복선처럼 영화 내에서 보이고 있다.

풍족하고 편안한 삶을 모두가 원하지만, 모두가 그런 삶을 살 수 없는 현실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부모에 의한 교육과 최소한의 통제가 이루어질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인의 또래 나이에 나무로 총을 만들고, 담배를 피우며, 폐허가 된 건물을 부수면서 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통제하지 못할 아이들을 계속 낳는 건 모두의 피해를 가져올 뿐이라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을 것 같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 삶의 질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에는 개인의 노력이 있을 수 있지만, 출생을 하면서부터 출발점이 다른 경우가 굉장히 많이 존재하는구나, 그렇기에 저 환경에서 좋은 삶의 질을 성취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게 되었다. 누군가의 잘못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고 올바르지 못했던 사회를 만든 전쟁이나 대립, 가난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로부터 이 모든 불행은 시작되고 답습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필자가 저런 상황에 처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안도가 되기도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필자가 그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슬픈 감정이 들기도 한다. 가버나움이라는 제목은 예수가 축복을 내렸지만 여러 요인들로 인해 축복이 유지되지 않은 마을이며, 생지옥이라는 별명이 붙은 성경 속의 마을이다. 자인이 살고 있는 저 마을도 가버나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지금 이 공간과 이 환경은 가버나움과 비슷한 공간일까, 아니면 다른 공간일까?

모처럼 가슴 찌릿한 감성과 여운을 느끼게 만드는 영화를 만난 진동이 퍽 오래 갈 듯 하다. 이제 이 겨울을 보내고 나면, 겨울을 그리워하는 추억이 한껏 쌓여갈테고, 그 그리움의 끝에 이 영화를 자리매김하면서, 필자는 조용히 겨울을 갈무리한다. 우리 주변으로는 앞으로 겨울의 끝자락에서 꽃샘추위 한 두 번 더 휘몰아치리라. 그리고 그 겨울을 견디는 우리의 소망들 위로 축복처럼, 기쁨처럼 이 영화의 기억이 덧입혀지리라. 그리하여 비단 만족하지 못할 형편일지라도 작은 행복이 샘솟는 현실을 사랑하게 되리라.

그렇게 새롭게 맞이하는 계절, 새 봄에는 우리에게 부여된 모든 것들을 감사하게 되리라. 작은, 그리고 사소한 많은 일들이 하나같이 감사의 대상이 되리라. 그런 마음으로 이 계절을 살아가리라. 감사하는 마음은 늘 우리를 기쁘게 한다. 감사하는 말 한 마디는 항상 우리로 하여 미소를 머금게 한다. 그러니 “당신 덕분이예요”라고 좀 더 자주 말하자. 즐거움과 행복은 언제나 함께 하는 것, 감성이 풍부하지 못한 사람은 줄곧 ‘나’만을 앞세운다.

그러나 감성이 풍부한 사람은 늘 ‘당신’을 먼저 생각한다. 나를 앞에 두든, 당신을 앞에 두든 놓인 위치로는 조금 달라 보이지만, 사실 그 효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감사의 마음이 담긴 말은 작은 노력으로도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지만 원망이 서린 말은 아무리 애써 노력해도 성과가 없기 마련이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길 원한다. 나 자신부터 작은 일에 감사하자. 그렇게 살겠다는 마음을 먹는다는 사실 하나로 시작인 거다. 그 시작이 일생의 삶의 얼굴을 만드는 기본이 된다는 생각으로 오늘을 살아가면 된다.

삶의 기적이란 게 어떤 것인지 당신은 아는가? 그것은 가끔씩 겪게 되는 뜻밖의 만남이다. 기차 시각이 아직 여유가 있어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던 중에 우연히 오랜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와 조우해 악수와 함께 따스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 중학교 시절 친구를 생각지 않게 길가에서 만나, 내가 가야 할 약속 장소를 잊은 채 “우리 예전에 그랬었지!” 하고 크게 웃으며 이야기 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이다.

삶의 기적, 그것은 여태껏 느끼지 못한 세상을 다시 한 번 느끼는 것이다. 오랜만에 올려다본 하늘에 별이 무척이나 많은 것을 보고 “와!” 하며 그 아름다움에 탄성을 지르는 것이다.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보며 잠시 세상 근심을 모두 잊고, 넋 놓고 어린 시절 추억이라는 보석상자를 열어 보는 일이다. 거창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것들이 삶의 기적이다. 문제는 당신의 가슴이다. 이것들을 기적이라고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당신은 세상의 기적을 충분히 누리는 사람이다. 소소한 일상에서 기적을 만들고 빚어내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뭔가를 주고받을 때. 어떤 사람은 주로 먼저 주고 나중에 받는다. 또 어떤 사람은 받고 나서 나중에 준다(Take & Give). 사람들은 누구를 더 좋아하며, 누가 더 성공할 가능성이 클까? 얼핏 보면 그게 그것이다. 하지만 효과 면에서 보면, 그 둘은 완전히 다르다. ‘받는 만큼만 일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보수 이상으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비웃는다. 그러면서 ‘더 많이 주면 더 열심히 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고용주라면 어떤 이들에게 더 많은 보수를 지급하겠는가? 더 많은 보수를 받고 싶다면 먼저 보수 이상의 일을 해야 한다. 그리하여 회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더 많은 보수를 지불하면서라도 사장이 붙잡고 싶은 사원이 된다. 가끔 사회생활을 하는 젊은 친구들로부터 고용주와의 관계로 인한 고충에 관해 이야기를 들을 때, 또 개인 사업을 하는 이들로부터 소비자에 관한 불만의 소리를 들을 때, 필자가 늘 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내게 주어진 한도액에서 절약을 해서 내 돈을 만드는 것도 참 힘이 들더라. 하물며 남의 주머니에 있는 돈을 내 주머니에 옮겨 담으려면 얼마나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하겠는가?” 물질적인 이해관계에 있는 경우 위의 글이 절대적으로 적용이 된다는 생각이 든다마는, 그러한 이해관계를 떠난 순수한 인간관계일 때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무조건적인 베풂이 때로는 상대방에게 거부감이나 부담으로 느껴질 수도 있긴 하다.

또 주고 받는 것에 적당함과 형평성을 잃고 너무 주기만 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받는 것에만 길이 들게 하는 것은, 그것이 물질일 경우에는 더더욱 상대방을 정신적으로 피폐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 결국 감사함에 무디어지게 하는 요인이 된다. 그래서 구제의 경우 무조건적인 구제는 오히려 상대방에게 해악이 되는 법이라고 할 수도 있다. 주는 것과 받는 것. 글의 맥에 약간의 괴리가 느껴지긴 하지만 나름의 ‘Give & Take’에 대해 생각을 정리해본 것이다.

갓난아이가 엄마에게 애정을 보이는 건 모유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따뜻한 신체 접촉 때문이라고 한다. 일상 속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가치를 느끼는 건 돈이나 물질적인 무엇이 아니라 기쁨과 슬픔을 더불어 함께 나눌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이다. 옷이 별로 없다면 헌 옷을 입으면 되고, 배가 고프면 물이라도 마시고 참을 수 있지만, 마음의 상처는 오직 따뜻한 사람의 위안으로 치유 되는 것이다. 누군가 남몰래 가슴 아파하고 있다면 가만히 손을 잡아주자.

많이 아파하고 부족했던 우리가 이렇게 잘 자랄 수 있었던 건 차가운 내 손을 언젠가 누군가가 따뜻하게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아픈 사람은 가슴을 보듬어주고,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더불어 함께 하는 따뜻한 마음이 언제나 내 마음과 당신의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으면 좋겠다. 가족들과의 스킨쉽도 많이 많이 하자. 말을 하기 보다 많이 들어주자. 외면하지 말고 따뜻한 시선을 고정시키자. 그게 바로 치유하는 마음이다. 사랑하는 이들이 건강하면 나 또한 절로 건강해지는 법이다.

몸이 너무 편하거나 생활이 호사스러우면 마음은 만족하기보다 오히려 자극적인 쾌락을 추구하게 되고, 몸과 마음이 호사스러움과 쾌락을 즐기다 보면 정신과 영혼은 서서히 병들게 된다. 몸과 마음이 시련을 겪게 되면 그 시련 동안에는 괴로울 것이나, 시련이 끝나고 보면 정신과 영혼은 겪은 시련만큼 성숙해져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바로 시련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깨달음을 얻는 빠른 길은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에 의하는 것이며, 인생에 대한 깊은 자유를 통하여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고 자성을 발견함으로서 일 것이다.

시련에 의하든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의하든 깨달음이 있으면 정신과 영혼은 건강하게 성숙할 것이고, 쾌락 속의 방종이라면 정신과 영혼은 병들고 황폐하게 될 것이다. 보이지 않는 우물이 깊은지 얕은지는 돌멩이 하나를 던져보면 안다. 돌이 물에 닿는 데 걸리는 시간과, 그 때 들리는 소리를 통해서 우물의 깊이와 양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내 마음의 깊이는 다른 사람이 던지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내 마음이 깊으면 그 말이 들어오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리고 깊은 울림과 여운이 있다. 누군가의 말 한 마디에 흥분하고 흔들린다면 아직도 내 마음이 얕기 때문이다. 마음이 깊고 풍성하면 좋다. 이런 마음의 우물가에는 사람들이 모이고 갈증이 해소되며 새 기운을 얻는다. 비난이나 경멸의 말(돌던짐)에 내 우물은 어떻게 반응할까? 내 마음의 우물은 얼마만큼 깊고 넓을까?

세상이 아무리 험악할지라도 진정 사랑을 거부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든, 정말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면, 그는 희망을 갖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문제가 무엇이든 간에 이겨낼 힘을 얻는다. 어려움을 만난 사람에게는 더욱 더 사랑이 필요하다. 사람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유형이 있다. 키가 큰 사람, 말을 재미있게 하는 사람, 잘 생긴 사람, 귀여운 사람, 터프한 사람, 돈 잘 쓰는 사람, 날씬한 사람, 통통한 사람 등 다양하다.

그런데 이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취향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희망하는 유형이 있다. 마음이 넓은 사람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좁고 작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자신은 사랑받고 싶어 한다. 때문에 그런 자신을 이해할 사람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넓히기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이 넓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땅에는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적다.

처음 만났을 땐 마음이 넓은 것 같지만 조금 지나면 그도 역시 우리만큼 밖에 안 되는 속 좁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또 다시 마음 넓은 사람을 찾아간다. 세상에서 자신보다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번개를 맞는 것 보다, 넓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 어렵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 그는 바보를 천재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고, 고장난 세상을 고치는 기술자다. 우리가 남들보다 조금 더 사랑할 줄 안다면, 우리는 모든 곳에서 환영받는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사랑받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주는 사람이 세상의 참된 주인공이다.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의 아들 ‘조비’. 그는 평소 동생인 ‘조식’을 눈엣가시처럼 여겨 “내가 일곱 발자국을 걷는 사이에 시를 한 수 짓지 못하면 중벌로 다스리겠다”라고 하면서 시 짓기를 명령하는데, 이 명령에 따라 조식이 건네준 시가 ‘자두연두기’라는 시다. ‘煮豆然豆其(자두연두기, 콩을 삶는데 콩깍지를 떼니) 豆在釜中泣(두재부중읍, 콩이 솥 안에 있어 운다) 本是同根生(본시동근생, 본래 이들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는데) 相煎何太急(상전하태급, 서로 삶기를 어찌하여 급하게 구는가)’

형제란 콩과 콩깍지와 같은 사이인데 왜 그렇게 들들 볶아대느냐라는 말을 역설적으로 풀어놓고 있다. 콩과 콩깍지에 대한 비유는 비단 형제에 머무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정치에서는 뜻을 같이 한 동지, 회사에서는 목표를 함께 하는 동료, 가정에서는 평생을 같이 할 부부, 그리고 수없이 많은 콩과 콩깍지가 있는 것 같다. 누가 콩이고, 누가 콩깍지인들 무슨 상관인가? 서로 위하고 조금 더 감싸줄 수 있다면 되는데 말이다. 콩깍지 없는 콩 없고 콩 없는 콩깍지는 없다. 오늘 하루 약간의 생각을 바꾸어 콩깍지의 역할을 해봄은 어떨까?

우리 마음이 순결하다면 얼마만큼 깨끗할 수 있을까? 우리 생각이 의롭다면 얼마나 높이 의로울 수 있을까?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얼마나 깊이 사랑할 수 있을까? 추수가 끝난 빈 들에서 남아 있는 이삭을 줍듯이 순결과 의로움과 사랑의 이삭이라도 주워 그것으로 빈 가슴을 채우고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기다린다면 언제까지 기다릴 수 있을까?
우리가 참을 수 있다면 어떤 일까지 참아낼 수 있을까? 우리에게 멀리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먼 앞 날의 일까지 알 수 있을까?

편지를 길게 쓴 다음 깜빡 잊은 것이 있어 덧붙이는 ‘추신’처럼 기다림과 인내와 지혜의 작은 끝자락이라도 붙잡고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 마음에 평안이 있다면 얼마나 잔잔해질 수 있을까? 우리에게 감사가 있다면 얼마나 깊이 감사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기쁨이 있다면 얼마나 오랫동안 기뻐할 수 있을까? 하루의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때 잠시 펼쳐지는 서쪽 하늘의 노을처럼, 평안과 감사와 기쁨을 잠깐씩이라도 내 가슴에 펼치면서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에게 희생이 있다면 무엇까지 내어놓을 수 있을까? 우리에게 용서가 있다면 어떤 사람까지 용서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겸손이 있다면 어디까지 낮아질 수 있을까?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같이 연약한 우리들이기에 희생과 용서와 겸손의 작은 촛불이라도 켜 내 주위를 단 한 뼘이라도 밝히면서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추신’은 왠지 다시 주어지는 기회처럼 느껴진다. 앞만 보고 달려가다가 멈칫 뒤를 돌아보고 혹시 떨어뜨린 것, 또는 잊고 떠나온 것은 없나, 지나온 나의 발자취를 점검하게 하는 마지막 찬스 말이다.

계절이 바뀌고 있는 탓일까? 최근 들어 부쩍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 우리네 삶도 음악 악보의 되돌이표처럼 그렇게 어느 시점만큼 되돌아 갈 수 있다면, 그래서 다시 살아질 수 있다면, 같은 상황에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시간을 거꾸로 되돌릴 수 없듯이
우리의 지나 온 삶의 조각들 또한 다시 흐트렸다가 새롭게 조합을 하기는 어렵다. 아니, 아예 불가능하다. 그렇더라도 혹여 깜빡 놓친 것, 잊고 있었던 것들에 관하여, 편지를 쓰고 추신을 덧붙이듯이 삶의 여정에서 아쉬웠던 것들을 되짚어 찾아내고 보완해 나갈 수 있다면, 앞으로의 삶이 좀 더 부유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춥지만 햇살이 잘 퍼지고 있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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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바람 계곡을 돌아
땅거미에 어깨겯고 슬금 어우러지면,
겨울숲이 절벽을 타고
바위아래 터잡아 슬몃 뿌리 내리면

겨울산 홀로이 남아
사람 그리운 그리움에 소름 돋누나

태양빛 익히 보았기에 밤은 더욱 외롭고
사랑맛 이미 알았기에 이별 이리 아프니

달 뜨면 덩달아 별들도 떠올라
구름 흐를 땐 이내 숨죽이는 세상사
상처마다 층층이 스민
시린 기운에 밤은 못내 섧어라

마음속 사람을 지운다고
그리움이 아주 지워지는 건 아닌데,
그래서 그러는 건 아닌데

산은 어느덧 숲에 어울려
겨울풍경이라는 이름 만들고
별은 넌지시 어둠 손잡아
겨울하늘이라는 보석 빚건만

왠지 내일은 더 아플 것 같아
밤이 또 슬프네
그리움으로 지는 저 겨울밤이 슬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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