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네번째 가상詩集입니다.

2012년 봄부터 씌여진 詩들입니다.
實驗詩적인 성격의 習作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오늘까지 계속 이어져오는 역사의 章입니다.

처음 詩人의 길에 入門한 이래로
이제껏 40년 이상을 지어온 詩이지만 아직도
정확한 詩의 정의를 내리지 못한 채,

판도라의 상자를 가슴에 품어안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풍운아로 떠돌며
詩의 본질을 찾아 헤매고 있는
詩人 林森의 애환이 드러나 있습니다.

林森의 고행은 그래서
지금도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그의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쭈욱 ~~

詩人의 멍에를 天刑으로 걸머지고 있는 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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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의 세월 *



시작노트

" 아내의 세월 " 詩作 note

‘부부의 날’이라는 제목의 기념일이 지났다. 이 날에는 주인공이 양 쪽 모두다. 이른바 서로가 서로를 축하해주어 마땅한 날이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녀들로부터 받는 축하가 아니고, 그냥 오롯이 부부가 서로를 향해 축하를 보내라는 뜻이다. 힘들고 버거운 삶의 여정을 함께 해준 것만으로도 축하받아 당연한, 변변치 못한 사람을 가장 가까운 지근거리에서 보살피고 챙겨주면서 긴 세월 늙어졌음에, 받들어 칭송받아야 하는 사람을 향한 사모의 날이다.

5월은 이런 저런 기념일이 많으니 하나씩 챙기다보면 그럭저럭 한 달 지나가기 마련이고, 그렇게 이 달 안에 다 들어있으니 저마다의 의미보다는 뭉뚱거려서 그냥 감사의 달이라 하면서, 분위기에 젖어있으면 되는 셈이다. 그래서 사실상 특별하게 누군가를 향한 감사와 보은의 색깔이 유달리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그런 면에서는 이 달이, 오히려 대충 생각하고 보내면 그만인, 허울만 강요하는 건 아닌가 하고 의구심을 지필 때도 있으니 필자만의 궤변일까?

아무튼 그 중의 하나지만 ‘부부의 날’에 감사하기 위해서, 감사할 사람을 억지로 머리에 떠올리다가 갑자기 우울해졌다. 도대체 새삼스러운 감사가 무슨 의미란 말인가? 평생을 살면서 지은 죄와 잘못이 하늘에 닿았거늘, 그래서 누구 앞에서도 얼굴 들지 못하고, 제대로 가장 역할, 남편 노릇, 아버지 구실을 감당치 못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입장인데, 대관절 무엇으로 어떻게 감사하며, 이 날의 의미를 즐거이 가슴으로 새긴다는 말인가?

한 마디로 언어도단이다. 우선은 이 정도 전제를 걸어놓고 반성과 회한의 시간으로 들어가자. 드라마나 소설을 보면 참 예쁘고 고운 부부의 이야기가 많기도 하다. 어쩜 그리도 서로가 서로에게 한결같은지, 정말이지 감정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저렇게 알콩달콩 살 수가 있는 걸까? 할 정도로 불가사의한 부부의 정과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도 참 많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끼지 못하는 처지라면, 그 자체만으로도 일단은 불행한 부류임에는 틀림이 없다.

원인이 어디에 있든, 누구의 불찰이든 화목한 부부의 관계를 이어가지 못했다면, 결과적으로는 행복하지 못한 부부 생활을 만든 건 엄연히 두 당사자다. 일방적으로 양보와 인내를 강요하면서 억지로 부부 생활을 이어가는 것만이 물론 능사는 아니다. 어차피 그리 살 바에는 더 늦기 전에 헤어지거나 관계를 청산하는 것이 나은 방법일 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작 보통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키 어려운 지경에 처해버린다는 가정 하에서나 벌어질만 한 일을, 너무도 가볍고 쉽게 판단하고, 최상의 결론인 양 선택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는 데에도 우리의 비극은 존재하게 된다. 지나고 나서 생각하면 틀림없이 다른 방도가 보일테지만, 이미 지난 일이라면 되돌 릴 방안은 없다. 오늘날의 부부간의 불화나 분란은 대부분 자신들의 문제보다는, 관련되어있는 남들과의 사정이나 비교 등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행복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행하게 될 통로를 미리 정해놓고 서로를 억지로 밀어부치면서, 마지막 비상구를 향해 돌진하는 사례를 어렵지 않게 주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조금만 참으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조급하고 초조한 마음에서, 급조된 결론을 서로에게 요청하다가 결국은 파멸의 길을 선택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인생이 장난이 아니고, 한 번 간 길은 다시 되돌아 갈 수 없는 절대적인 외통수의 길인데도, 마치 남의 일같이 단조롭게 처신하며 길을 결정하는 걸 볼 때마다 너무도 안타깝다.

어차피 사람은 미완성의 개체다. 그래서 혼자서 모든 걸 이룰 수는 없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기대고, 그러면서 상대방을 감싸고 보듬으며 서로의 힘을 나누어 갖는 것이 삶의 지혜다. 그렇게 가장 근본적인 힘의 근원을 마련하기 위해서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창조된 것이고, 그 속을 채우는 가장 원초적인 구성원으로 부부라는 존재가 선정되었음이다. 부부로부터 시작된 가정의 형성 존재가 자녀와 친지로 이어지면서, 사회와 국가의 구성원으로 뻗어나가,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고 근간이 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어찌 중요한 진리가 아니겠는가? 가벼운 생각으로 함부로 처신하거나, 자의적인 해석으로 가정이나 부부의 의미를 폄훼해서도 안되는 절대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부의 의미를, 혹은 남녀의 구분을 쌀과 보리에 빗대어 비교한 흥미로운 글이 있다. 예컨대 ‘쌀(米)과 보리(麥)의 궁합’이다. 쌀은 여성의 성질을 가지고 있고, 보리는 남성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벼에는 수염이 없으나, 보리에는 수염이 있다.

그리고, 쌀밥은 부드럽고 감미로워서 먹기가 좋으나, 보리밥은 거칠고 쌀밥처럼 달콤하지 않다. 조물주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해서 물과 불은 서로 상극이면서도 둘이 만나지 않고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게 정해 놓았다. 여성과 밭은 ‘화성(火性)’이며, 남성과 논은 ‘수성(水性)’인데, 남성인 보리는 화성(여성)인 밭에서 생육하고, 여성인 벼(쌀)는 수성(남성)인 논에서 생육한다.

남성은 여성의 밭에서 생존하며, 여성은 남성의 논에서 생존할 수 있음은 재미있는 현상이다. 이는 곧 남녀간에 서로 다른 이성이 없이는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여성인 벼(쌀)는 어릴 때부터 생장한 묘판에 그대로 두면 벼 구실을 하지 못하므로 반드시 남성의 집인 논으로 옮겨 심어야 하고, 남성인 보리는 싹이 난 바로 그 자리에서 옮기지 않고 계속 살아가게 된다.

이들 생태는, 여성은 시집을 가서 살아야 정상적인 여자 구실을 할 수 있고, 남성은 성장한 자기 집에서 살아가는 것이 정상임을 일깨워준다. 여성들의 가장 큰 비애가 시집가는 일이라고도 할 수가 있으나 이것은 조물주의 깊은 뜻에 의한 섭리임을 깨달아야 한다. 세상에는 간혹 아들이 없거나 재물이 많으면, 딸자식을 내 집에 두고 사위를 맞아들여 살게 하는 부모들을 볼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딸은 여자의 구실을 할 수가 없으며, 사위 또한 남자의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

벼와 보리는 어릴 때는 꼭 같이 고개를 숙이지 않으나 익을수록 벼(여자)는 고개를 숙이지만, 보리(남자)는 익어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그래서, 보리의 성을 지닌 남성은 젊어서나 늙어서나 아내에게 고개를 쉬 숙이지 않는 천성이 있지만, 여성은 나이가 들고 교양이 있어 속이 찬 여인은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미덕을 갖게 되며, 이런 여성을 ‘품성을 갖춘 여인(賢母良妻)’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여성인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듯이, 나이든 여성들은 남성들의 천성을 체험을 통해 이해하게 되므로 머리를 숙이듯 이해하고 참아준다. 여성의 그런 품성 덕분에 가정에 평화가 있고, 변함없는 부부의 애정을 지킬 수가 있다. 시간이 지나도 꼿꼿하게 고개를 숙이지 않고 서 있는 벼 이삭이 제대로 여물지 못한 쭉정이이듯이, 숙일 줄 모르는 여인 또한 속이 차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화(家和)의 바탕은 아내에게 달려 있다. 남편을 굴복시키려는 생각이나 맞서려는 생각보다는, 익은 벼가 머리를 숙이듯이 져주면서 미소와 애교라는 부드러운 무기를 사용한다면 아내에게 굴복하지 않을 남편은 아마도 세상에 없을 것이다. 물론 좋은 말로 여성을 달래면서 결과적으로는 인내와 양보의 미덕이 여성에게 있음을 강요하는 논리라고 오해를 한다면, 이 또한 달리 핑계를 댈 방안은 없다. 다만 여성의 유전인자가 남성에 비해 오묘하고 우아함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인정한다, 남성의 한 사람으로서.

이젠 현실로 되돌아오자. 비판하고 한탄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고, 다시금 마음을 다잡아 좋은 생각과 따뜻한 마음을 회복하여 아름다운 삶의 초원에 동참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니까 말이다. 잘못된 선택이었다면 얼른 방향을 변경하고, 실수였다면 인정하고 뉘우치면서 또 다른 길로 길을 잡으면 된다. 한 번 실수는 오히려 더 나은 삶에 도움으로 작용할 중요한 요인이 되어지기도 한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어떤 여성의 고백에 귀를 기울여보자. -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사춘기가 되면서 잔소리가 많은 할머니를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할머니의 방이 따로 마련되지 못해 제 방에서 지내셨는데 저는 그게 싫어 짜증을 내기 일쑤였습니다. 중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할머니는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다리를 절게 되셨습니다. 그 전까지 참 깔끔하고 옷차림이 단정했었는데, 거동이 불편해지고 나서 방에서 시큼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엄마, 나 할머니랑 방 쓰기 싫어!” 그 후, 우리 집은 방이 두 개 더 많은 집으로 이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저는 할머니와 다른 방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방이 달라져도 반갑게 맞아주시는 할머니는 그대로였지만 별다른 이유가 없이 저는 할머니가 싫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는 제가 대학교 때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신 날 가족 모두가 슬픔에 빠져 있을 때였습니다. 엄마는 나에게 알록달록한 팔찌를 주셨습니다.

그 팔찌는 제가 초등학교 때 할머니께 선물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동안은 까맣게 잊고 지내왔는데 할머니는 손주가 준 그 팔찌가 얼마나 소중했던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하셨습니다. 전 한동안 팔찌를 들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

우리는 누구나 철없던 어린 시절 멋모르고 세상을 살아서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어른이 되어서야 하나씩 깨우치고 있다. 철이 든다는 것은 내 입장보다 주위 사람들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우리가 육체적인 나이를 아무리 많이 먹었다고 해도 생각하고 처신하는 삶의 모양새가 어리석고 우매하다면 진정한 어른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우선은 자신의 생각을 올바르게 정립하고, 그런 기초 하에 삶의 방식들을 하나씩 표현하는 것이 처세이며 인간관계의 표준이다. 그런 기초가 쌓여서 튼튼한 기반으로 올려지는 것이 바로 가정이다.

이러한 가정의 구성원인 부부사이에,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주거나 험담을 일삼는 것은 가장 유치하고 위험한 발상이다. 자신의 위엄이나 자존심을 내세우기 보다는 상대의 인격과 품위를 챙겨주는 품성이 결국은 스스로에게 복으로 돌아온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때로는 웃음과 여유로 위기와 난관을 극복하는 지혜가 참다운 처세이며 삶의 기술이다.

오래전 영국의 한 장관이 국민보건을 주제로 연설하고 있을 때였다. 이때 한 의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큰소리로 외쳤다. “장관, 당신은 수의사 출신이 아닙니까? 수의사가 국민의 건강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안다고 국민보건 관련 법안에 대해 그렇게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그 의원이 외친 말은 일종의 모욕적인 말이었다. 장내는 잠시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고, 몇몇 몰지각한 의원들만 껄껄거리며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 말을 들은 장관은 화를 내거나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차분히 말했다. “네, 의원님 말씀이 맞습니다. 저는 수의사 출신입니다. 그러니 혹시 몸이 아프시면 언제든지 제게로 오십시오. 의원님을 정성껏 치료해드리겠습니다.” 장관의 순발력 넘치는 답변으로 의회는 곧바로 웃음바다가 되었고, 인신공격을 한 그 의원은 오히려 웃음거리가 되었다.

때때로 상처 주는 말 한마디는 사람의 마음을 잃게 하지만, 재치 있는 유머 한 마디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며, 뜻하지 않은 위기에서도 상황을 역전시킨다. 이처럼 유머에는 놀라운 힘이 있다. 유머 감각이 없는 사람은 스프링이 없는 마차와 같다. 길 위의 모든 조약돌에 부딪칠 때마다 삐걱거린다. 마찬가지로 가정에서도 격조 있고 유쾌한 유머는 삭막하고 메마른 현실에 한 줄기 빛이 될 수도 있고, 마치 청량음료처럼 상큼하고 청아한 맛을 내기도 한다.

한 젊은 병사와 결혼해서 사막에서 살게 된 여인이 있었다. 그러나 사막의 황량함과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 그녀는 마침내 친정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다. “어머니, 저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이 메마른 사막이 너무도 싫습니다. 이곳은 사람이 살기에 끔찍한 지역이랍니다.” 그녀의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아주 짧은 답장이 왔다. “두 사람이 감옥의 철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진흙을 보았고 한 사람은 별을 보았단다.”

어머니가 보내주신 글의 의미를 깨닫게 된 그녀는 진흙이 아닌 별을 찾기로 했다. 그녀는 사막의 꽃인 선인장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 근처 인디언의 말과 풍습과 전통을 연구했다. 그 결과 그녀는 사막에 관한 전문가가 되어 좋은 책을 쓰기까지 했다고 한다. ‘바라봄’에는 법칙이 있다. 똑같은 것을 바라보아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어두운 감옥 철창 같은 곳인가? 아무리 캄캄한 곳일지라도 희망의 빛은 있다. 진흙을 바라보지 말고, 별을 바라보자. 행복과 불행의 대부분은 주변의 환경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다. 만일 가정에, 혹은 부부간에 문제가 있다면 필경 그에 대한 해답도 멀지 않은 어딘가에 감추어져 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다. 눈을 크게 떠보자. 그리고 다시 한 번 주의를 기울여 가까운 데부터 찾아보자. 희망과 꿈을 담은 내일의 멧세지가 반드시 어딘가 숨어있을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경영 컨설턴트였던 ‘데일 카네기’의 일화다. 그가 한창 활동하던 시절 대공황이 닥쳐왔다. 모든 사람이 힘겨워하는 가운데 그의 상황도 날로 악화되었고, 마침내 깊은 절망에 빠졌다. 더는 희망이 없었던 그는 강물에 몸을 던지려고 강 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한 남자가 그를 소리쳐 불렀다. 뒤를 돌아보니 누군지는 모르지만 두 다리를 잃은 사람이 바퀴 달린 판자 위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한 눈에도 그 사람 역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얼굴에 미소를 짓고 카네기에게 말을 걸었다. “연필 몇 자루만 사 주시겠습니까?” 카네기는 주머니에서 1달러 지폐 한 장을 꺼내주고 다시 강을 향해 걸어가려고 했다. 그러자 그는 열심히 바퀴 달린 판자를 굴리며 소리쳤다. “이봐요, 선생님! 연필을 가져가셔야죠.” 카네기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난 이제 연필이 필요 없어요.”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카네기를 따라왔다.

연필을 가져가든지 아니면 돈을 도로 가져가라고 말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남자는 그 상황 속에서도 계속 미소를 머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남자의 얼굴엔 그 누구보다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다. 그리고 카네기는 그 남자의 연필을 받아든 그 순간, 이미 자살할 마음이 사라져버렸다. 훗날 카네기는 자신의 자서전에 이렇게 표현했다. “그 당시에 나는 살아갈 희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두 다리가 없으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던 그를 보고, 나도 다시 한 번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슬픈 일과 기쁜 일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슬픈 일을 만났다고 해서 지나치게 비관할 필요가 없다. 슬픔이 지나고 나면 기쁨이 찾아오게 되어 있다. 이것이 세상 사는 이치다. 어떤 경우에라도 희망의 실오라기 하나만 놓지 않는다면 결국 좋은 날이 올 것이다. “나는 신발이 없음을 한탄했는데 거리에서 발이 없는 사람을 만났다.” 바로 위기에서 다시 살아나 성공 신화를 이룩한 ‘데일 카네기’의 말이다.

조선 후기 ‘현종’ 때 명의이자 우의정을 지낸 ‘허목’과, 학자이자 정치가인 ‘송시열’의 이야기다. 이 두 사람은 당파로 인해 서로 원수같이 반목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송시열이 중병을 얻게 되었다. 많은 약을 써 보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송시열은 허목 만이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하면서 허목에게 아들을 보내 약 처방을 부탁했다. 그런데 허목은 처방전 약재 중에 독약을 함께 달여서 먹으라는 것이었다.

처방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은 허목을 욕했지만 송시열은 의심 없이 허목의 처방대로 약을 먹었다. 그리고 얼마 뒤 씻은 듯이 병이 나았다. 서인 송시열과 남인 허목은 조정에서 만나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다툼과 대립을 했지만, 조정에서 물러나면 서로의 훌륭한 점을 인정하고 믿어주는 성품과 아량을 지녔다. 서로의 진실을 바라보는 혜안을 지니고 있었던 선조들의 지혜를 배워야 할 이유다.

우리 사회엔 얼굴 생김새만큼이나 다양한 생각을 가진 많은 사람이 한 데 어울려 살고 있다.나와 생각이 맞지 않는다고 무조건 배격하기만 한다면 결코 한 마음으로 함께 나아갈 수 없다. 라이벌일지라도 상대의 능력을 인정하고 신뢰하는 열린 자세가 세상을 바꾼다. 하물며 열린 마음으로 가정을 보듬는다면, 열린 생각으로 부부의 문제를 풀어간다면, 이 세상에 불가능할 일은 없다. 비단 그것이 아무리 높고 험한 장벽일지라도 함께 나아가는 길을 멈출 수는 없다. 그것이 바로 생활의 팁이다. 아무도 신뢰하지 않는 자는 누구의 신뢰도 받지 못한다.

이제 결론을 맺어보자. 부부의 날을 지내면서 필자는 과연 어떤 각오와 다짐을 해야 할까? 어차피 살아버린 반 평생, 회한과 한탄으로 엉절거린다 해서 되돌릴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이미 가버린 청춘과 잃어버린 건강을 되지필 수도 없다. 지은 죄를 통렬히 회개한다고 해서 용서를 받을 재간도 없다. 그렇다면 방도는 오로지 하나다. 주어진 삶의 여분을, 남겨진 삶의 여백을, 최선을 다해 사랑으로, 양보로, 봉사의 줄거리로, 그렇게 일기를 적어야겠다. 그렇게 다시 올 이듬 해의 ‘부부의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야겠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축하를 해주고, 다시 축하를 받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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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밤 꿈자리
금도야지 거름밭 헤집은 적 없거늘,
신새벽 우물가
겨울까치 헤설피 우짖은 적 없거늘,
동녘빛살 조각마다
설레임 글썽이더니 그예
감동의 얼굴로 미소피우며
살기 버거운 날 찾아주었구나,
임 오신 듯

때론 물컹 영혼 우에 충만으로
혹은 흠씬 마음 안엔 감격으로
묻어나는 소망 소망 소망
꽃잎인 양 흩날리며
시나브로 눈물 적시는
기쁨의 송가, 거룩한 울림

사랑이라는 이름하여
진즉 내 속에 자리매김된 당신의 존재,
사람의 생각으로는 그저 미련이 남아
훗날 추억으로서
아니면 흔적으로서,
머무르고싶었던 순간들 마다
아물지 않는 생채기되어
더더욱 아플지 모르겠지만

비록 뜻 모를망정
용케도 가락일랑 잊지 않아
청 높여 밑도 끝도 없이 이어가는 흥얼거림,
달팽이관 박히는
당신의 오늘 이 찬미소리는
영원까지 살아 내 가슴에 붉은 인 친다,
철철 몸부림치며 내닫는
피를 닮은, 아주 빨간

- 갑오 마즈막일요일 예배당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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