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네번째 가상詩集입니다.

2012년 봄부터 씌여진 詩들입니다.
實驗詩적인 성격의 習作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오늘까지 계속 이어져오는 역사의 章입니다.

처음 詩人의 길에 入門한 이래로
이제껏 40년 이상을 지어온 詩이지만 아직도
정확한 詩의 정의를 내리지 못한 채,

판도라의 상자를 가슴에 품어안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풍운아로 떠돌며
詩의 본질을 찾아 헤매고 있는
詩人 林森의 애환이 드러나 있습니다.

林森의 고행은 그래서
지금도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그의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쭈욱 ~~

詩人의 멍에를 天刑으로 걸머지고 있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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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욕과 절제 사이 *



시작노트

" 탐욕과 절제 사이 " 詩作 note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변치 않는 진리 중에, 사람의 역사는 결국 사람의 탐욕과 절제의 사이에 서서 끊임없이 발전해왔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탐욕이라는 표현은 사실 일반적인 글에 인용하기조차 별로 달갑지 않은 단어이다.
‘탐욕(貪慾)’에 쓰이는 ‘탐’자는 ‘탐낼 탐’자인데 ‘뜻을 나타내는 조개패(貝☞돈, 재물)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今(금→탐)’으로 이루어진 형성문자이다.
직접적으로 뜻을 풀이해보면 ‘자기(自己)의 뜻에 잘 맞는 사물(事物)에 대(對)하여 마음으로 애착(愛着)케 하는 정신(精神)작용(作用)’을 가리킨다고 사전에 나와있다.
문제는 이 애착이 도가 지나쳐 사물을 지나치게 탐하는 욕심으로 이어진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불교의 삼구(三垢) 또는 삼독(三毒)의 하나로 귀결된다.
삼독은 사람의 착한 마음을 독해(毒害)하는 세 가지 번뇌(煩惱)를 말하며, 곧 ‘탐심(貪心)진심(嗔心)미혹(迷惑)’을 뜻한다.
탐욕은 모든 죄악의 근본이 되고 고통의 씨가 되며, 탐욕을 다스리지 못하면 ‘요행심’과 ‘욕속심’을 조장하여 순리를 버리고, 역리로 탐하는 바를 얻으려고 하다가 마침내 패가망신(敗家亡身)에 이르고 만다.
사람의 욕구는 무한하지만 실제로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인데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한 욕구를 향해 질주하게 될 때 온갖 불의와 악행을 저지르게 된다.
그러므로 지나친 욕심을 제거하거나 절제하는 노력을 해야 하며, 그 방법으로 자기만의 이익을 추구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이익을 배려하는 공생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공동의 이익 속에 자기의 몫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면 극단적 이기주의에 떨어지지는 않는다.
‘소태산’은 “욕심은 없앨 것이 아니라 도리어 키울 것이니, 작은 욕심은 큰 서원으로 돌려 키워서 마음이 거기에 전일하면 작은 욕심은 저절로 잠잘 것이요, 그러하면 저절로 한가롭고 넉넉한 생활을 하게 된다,”고 하며 공익심으로 탐욕심을 대체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1924년 미국의 ‘MGM’사에서 제작한 무성흑백영화 ‘탐욕(Greed)’은 1880년대 초에 실제로 일어난 범죄를 소재로 한 ‘노리스’의 소설을 꼼꼼하게 재현한 것이었다.
주인공 ‘맥’은 한 돌팔이 의사의 도움으로, 어린 시절을 보낸 ‘북캘리포니아’의 광산마을에서 탈출하여 ‘샌프란시스코’로 가 치과의사가 된다.
거기서 그는 ‘트리나’를 만나고, 잊을 수 없이 소름 끼치는 치아를 뚫는 장면에서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이면서 트리나를 사이에 두고 경쟁하던 ‘마커스’는 처음에 두 사람이 결혼하도록 물러났다가 트리나가 복권에 당첨되자 생각을 바꾼다.
마커스는 지방정부와의 연줄을 이용하여 옛 친구 맥의 사업을 망하게 하고, 맥은 힘든 날품 노동을 하며 술에 절어 살면서 아내를 구타한다.
트리나는 당첨된 복권을 자기만족의 원천으로 삼고 수천 냥의 금화를 묵혀둔 채 남편과 함께 굶주린다.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트리나가 침대 위에서 돈을 성적인 대상인 양 애무하며 그 속에서 구르는 장면이다.
그 직후 맥은 그녀를 살해하고 그 돈을 훔쳐 죽음의 계곡으로 향하고, 거기까지 쫓아온 마커스와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는 것이 줄거리이다.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편’에 선정된 이 영화는 사람의 추악한 탐욕과 비참한 종말을 대칭시키면서 잔인함과 무정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누구에게나 잠재해있으면서 겉으로는 감추어진 본성과, 그것을 누르면서 중용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절제의 미덕을 아련하게나마 그리워하는, 사람의 나약한 속내가 가감없이 드러나는 오래된 거작이다.

필자는 본래 심성이 착하지 못해서 그런지 애완동물을 집에서 기르는 걸 그리 반기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들이 자라면서 이런저런 요청을 했지만 번번이 거절을 했다.
하나하나 이유를 들어 반대의사를 논리적으로 제시하면 아이들은 할 말을 잊고 입이 댓발이나 나와서 필자를 흘겨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작은아이가 사전에 상의도 없이 하교길에 샀다면서, 무턱대고 금붕어를 몇 마리 비닐봉투에 담아가지고 들어왔다.
야박하게 그것마저 거부할 수는 없는지라 그냥 작은 어항을 하나 사주었더니, 그날부터 집에만 오면 가장 먼저 금붕어 어항을 찾고, 금이야 옥이야 하며 공부하는 틈틈이에도 눈을 떼지 못하고 애지중지하는 아이의 재산목록 1호가 되었다.
하루는 필자가 혼자 집에서 원고를 쓰다가 심심해서 가만히 어항 속을 들여다보았는데, 금붕어들이 빤히 마주쳐다보면서 필자와 눈을 맞추는 꼴이 신기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해서, 큰 맘 먹고 어항 옆에 놓여진 먹이를 주게 되었다.
그런데 생전 먹이를 주어본 경험이 전무하니 적당량이 얼마인지를 가늠할 길이 없었다.
많으면 먹다 말겠지 하는 생각과, 모처럼 먹이를 주는 거니까 요량껏 인색하지는 말자 하는 심사로 한참을 부어주었다.
그리고는 후회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끊임없이 먹이를 먹다가 배가 빵빵해지면서 죽어가는 금붕어들을 속절없이 지켜봐야만 했다.
결코 중지하지 못하고 배가 터지도록 먹이를 먹는 금붕어의 탐욕은 알고보니 결국 죽어야 끝이 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당장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스스로에게 어떤 독이 되는지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금붕어와,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는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문화가 달라지고 문명이 발전하면서 어떤 전자기기는 점점 소형화가 되어가고, 다른 종류의 몸체는 더욱 커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정용냉장고는 용량과 크기가 점점 커지고 기능과 종류도 다양화되어진다.
냉장고가 커지다보니 그 속에 들어가는 물건들도 칸칸마다 가득하여 점점 더 많이 쌓여간다.
그런데도 막상 냉장고 문을 열고 주부들이 하는 첫 마디가 대부분 “먹을 게 없네.”이다.
거기 있는 것이 다 먹을 건데 왜 먹을 게 없다는 걸까?
사실은 그냥 ‘먹을 게’ 없는 것이 아니라 ‘먹을만 한 게’ 없다는 말일 것이다.
점점 더 먹고 싶은 것이 많아지고 다양해지다보니, 욕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음식들은 뒤쳐져서 냉장고 속으로 들어가 처박혀서는 이내 기약이 없이 대기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그리고는 새로운 음식에의 욕구로 눈높이가 맞추어지니, 기존의 음식들이 눈에 찰 리가 없다.
물론 기준이 높아지고 목표가 상향 조정된다는 것이 무조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요는 밑도 끝도 없는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현실에서 전혀 만족을 모르게 되고, 보람과 기쁨을 누릴 줄 모르게 되니, 급기야는 스스로에게 어떤 행복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개인의 탐욕은 개인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그 여파를 미치게 되는 것이 또 하나의 다른 문제이다.
‘탐욕’과 ‘시기’는 마치 동전의 양 면과 같아서 늘 누군가를 걸고 넘어지는 습성이 있다.
시기는 근거 없는 비교의식에 기인한다.
필자가 어렸을 적에는 집에 흑백TV만 한 대있어도 무진장 행복으로 여겼었다.
그러나 옆 집에 칼라TV가 들어온 순간부터 그 행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막론하고 칼라TV가 장만되어야만 그 행복의 이야기는 다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 때까지는 한없이 이웃집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비교하는 그릇된 타성에 흠뻑 젖어버린다.
이런 본성을 상업주의가 놓칠 리가 없다.
결국 시간과 비례하여 브라운관에서 LED까지, 화면의 대형화와 선명도의 극치로 진화하던 TV가, 이제는 커브드곡선 화면이라는 한 층 더 발전된 제품을 선보이면서 다시 우리의 소비를 부추기고 있다.
아마도 완벽한 선택의 정점을 향한 끝없는 고난의 행진이리라.
어디 TV 뿐이랴?
핸드폰, 자동차, 아파트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하면서 목소리 높여 자신들의 주장을 강요하며 정작 우리 삶에 주인 노릇을 하려 드는 물품들이 하나 둘인가?
실로 통탄할 일이다.
“만일 체중이 줄어든다면”, “만일 승진만 된다면”, “만일 대학에 합격한다면”, “만일 아파트로 이사한다면” 등등의 “~이라면”이라는 사람의 바램은 끝을 모르니 어차피 그 한계가 없다.
그렇기에 근본적으로 항상 새롭고 좋은 것에 대한 추구와 탐심은 누구도 막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여기서 주저앉거나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실을 바로, 눈 크게 뜨고 보자.
최우선적으로 당면한 현재의 상황에 자족하고 절제하는 마음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자각해야 한다.
이제까지의 타성과 습관에서 벗어나 한 걸음 도약하는 새로운 삶의 청사진을 만들어야 한다.
쓸 데 없는 길인 줄 알면서도 마땅히 다른 길을 찾을 방도가 없다 하여, 그 길을 합리화시키는 아집과 우를 다시는 범하지 말고, 보다 인간다운 중용의 삶을 살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사는 길이 우리의 의무이요 과제이다.
그걸 명심, 또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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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삼의 살며 사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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