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네번째 가상詩集입니다.

2012년 봄부터 씌여진 詩들입니다.
實驗詩적인 성격의 習作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오늘까지 계속 이어져오는 역사의 章입니다.

처음 詩人의 길에 入門한 이래로
이제껏 40년 이상을 지어온 詩이지만 아직도
정확한 詩의 정의를 내리지 못한 채,

판도라의 상자를 가슴에 품어안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풍운아로 떠돌며
詩의 본질을 찾아 헤매고 있는
詩人 林森의 애환이 드러나 있습니다.

林森의 고행은 그래서
지금도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그의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쭈욱 ~~

詩人의 멍에를 天刑으로 걸머지고 있는 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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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론지노의 창으로 찌른 달 *



시작노트

" 론지노의 창으로 찌른 달 " 詩作 note

MBC의 인기 프로였던 ‘서프라이즈’에 자주 등장하던 주제 중 ‘롱기누스의 창’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성창(聖槍, 라틴어: Sainte Lance)’을 의미하는 명칭인데,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한 병사가 그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는데, 거기 예수의 피가 묻었다고 여겨지는 창이다. 기독교의 상징적인 성유물 가운데 하나이다. 신약성경의 ‘요한 복음서 19장 34절’에 기록되어 있으며, 일부에선 복음서의 저자인 ‘사도 요한’이 집필 당시 ‘가현설’ 논란이 있자 예수가 죽었음을 확실히 하고자 집어넣은 표현이라는 주장도 있다.

나중에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병사의 이름이 ‘론지노’라고 알려지면서 ‘론지노의 창(라틴어: lance de Longin)’ 또는 ‘운명의 창’이라고도 불리게 된다. 이 창은 ‘히틀러’가 소유한 적이 있다고 하여 더 유명해진 유물이다. 실제 이 창이 ‘로마 시대’, 그것도 성서에 기록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찔렀던 그 창이 맞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전설에 의하면 이 롱기누스의 창을 소유한 자는 엄청난 권력을 쥐게 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참으로 우습고도 단순하다. 하나님의 아들을 찌른 창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그러나 사실은 그 창으로 찔러 예수가 죽은 것도 아니다. 이미 구원 사역을 완성하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선언하고 숨을 거둔 후에 그 죽음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로마 군사 하나가 예수의 옆구리를 그 창으로 찌른 것 뿐이다. 그 찌른 몸의 흔적에서 나온 것은 ‘물과 피’였다. 여기서 물과 피라는 것은 단순히 몸 속에 있는 생리적 물질로서의 물과 피가 아니다.

여자가 아기를 잉태하고 출산할 적에 나오는 것이 바로 물과 피이다. 즉 물과 피는 생명의 출산을 의미한다. 이 사건이 왜 중요한가? 성서적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 나온 그 물과 피로 말미암아 교회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유형의 교회가 아니라 우주적 교회를 의미한다. ‘사도 요한’이 이 기록을 기록한 이유는 바로 ‘아담’이 깊이 잠든 후에(깊이 잠들었다는 것은 앞으로 올 둘째 아담, 곧 예수의 죽음을 암시한다) 그 옆구리에서 갈빗대 하나를 빼내어 여자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즉, 예수의 옆구리가 찔리며 나온 것이 결과적으로 교회의 탄생으로 이어지듯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온 존재가 바로 ‘하와’(흔히 ‘이브’라고 하는)인데 하와는 아담의 신부가 된다. 이처럼 예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탄생한 것이 바로 ‘예수의 교회’라는 말이다. 예수의 교회는 그냥 나온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나왔는데, 그 희생을 증명해주는 물질이 바로 물과 피라는 것이다. 한 편, ‘아더 왕 이야기’에 묘사되는 예수의 성스러운 창은 그 기원이 다양하며 많은 의미를 감춘 수수께끼 투성이의 무기다.

이 창에 관한 이야기는 12세기 ‘프랑스’의 시인 ‘크레티앵 드 트루아(Chrtien de Troyes)’가 쓴 ‘성배 이야기(Le Conte du Graal)’가 그 줄거리를 대체로 결정했고, 그 뒤 ‘독일’인 ‘볼프람 폰 에셴바흐(Wolfram von Eschenbach)’가 쓴 ‘파르치발(Parzival)’, 나아가 15세기 ‘영국’의 ‘토머스 맬러리’가 정리한 ‘아더 왕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 기원은 ‘켈트의 민화’라는 설도 있고 성서라는 설도 있으나, 이들 모두 명확한 기원으로 규정지을 수는 없다.

성배와 성창을 묘사한 아더 왕 전설은 이 밖에도 그 수가 매우 많다. 본래 크레티앵의 작품 자체가 미완이고, 이야기의 결말은 후세의 작가들이 각자 나름대로 상상하여 만들었으므로 이들 전설에는 공통된 줄거리를 찾기 힘들다. 그 중 다양한 전승을 집대성한 것으로 보이는 ‘맬러리’의 작품은 성스러운 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아더가 왕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그의 수하 중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알려진 ‘베이린 경’이라는 기사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더 왕의 궁정에서 한 여성을 죽인 죄로 추방을 당하고 만다. 방랑하던 베이린 경은 ‘어부왕’이라 불리는 왕이 살고 있는 성을 찾아간다. 이 평화로운 성을 방문하는 손님은 누구나 무기를 맡겨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베이린 경은 손님 중에 비열하고 사악하다고 알려진 ‘가론 경’이라는 기사가 있는 것을 알고 만일에 대비해서 품속에 단도를 감추고 들어갔다.

한창 연회가 열리고 있을 때 그는 가론 경의 행실에 화가 나 품속에 숨겨둔 단도로 그를 죽이고 만다. 이에 성주는 금지된 무기를 감추고 들어온 베이린 경을 크게 꾸짖고 죽음으로 책임을 지라면서 공격해온다. 베이린 경은 성주의 공격을 단도로 막았지만 이내 단도가 부러지고 말았다. 맨 손이 된 그는 성 안을 도망 다니며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았다.

그 때 베이린 경이 발견한 무기는 성배와 함께 이 성에 보관되어 있던 성스러운 창이었다. 베이린 경은 이 창으로 어부왕을 찔러 치유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 그리고 이 소동으로 성은 와르르 무너지고 주위 일대는 초목이 나지 않는 황무지로 변했다. 심하게 다친 어부왕은 나중에 ‘갤러해드 경’이 성배를 발견하여 치유해줄 때까지 크나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는 성배와 함께 등장하는 기독교의 성스런 유물을 대표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하고 6백 년 뒤, ‘예루살렘’은 ‘페르시아군’에 점령당했다. 이 때 이 창은 두 개로 나뉘었다.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창의 앞부분이 부러진 것이었다. 앞부분은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로 옮겨져 보석으로 장식되어 십자가 중심부에 묻혔다.

그리고 당시 기독교 교회였던 콘스탄티노플 소재 ‘아야 소피아’에서 거두었는데, 80년 뒤에 본체도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져 와서 한동안 그곳에 보관되었다. 600년 뒤 ‘프랑스’ 국왕 ‘루이 9세’가 창의 앞부분 조각을 사들였다. 신과의 연결을 나타내는 ‘성유물(聖遺物)’을 가진다는 것은 영예로운 일로써 그 나라의 위신을 높이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리’에 보관되던 창의 앞부분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행방불명되었다.

한 편 창의 본체는 15세기에 ‘이슬람 세력’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던 때에도 그 자리에 보존되었다. 그 소재지는 ‘파리분묘교회(聖墳墓敎會)’에 존재하던 것으로 알려진 이 창을 교황 ‘인노센티우스 8세’에게 기증했는데, 이렇게 콘스탄티노플의 근거와 나뉜다. 1492년에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예지드 2세’는 예루살렘 소재 성다에서 술탄의 자리를 노리던 동생을 ‘이탈리아’에 유폐하기 위해 창을 교환 조건으로 내세운다. 이후 창은 ‘산 피에트로 대성당’에 보관되어 공개되지 않고 있으며, 묘사된 사진만 보면 그것이 과연 로마 것인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오늘은 시작노트를 이용해서 성경 속의 소재에 집중하다보니 마치 전문서적인 양, 역사와 신화의 범주를 넘나들면서 제법 심오한 전개로 이어졌다. 어울리지 않게 골치 아픈 사념이 너무 길어진 듯 하다. 이 이상 파고드는 건 문외한의 치기일테니 중단하기로 한다. 혹여 독자분들 중에 이 롱기누스의 창에 관해 더 알고 싶은 분은, 관련서적이 다양하니 참조하시기 바란다.

우리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낱말들 중 거꾸로 읽으면 뜻이 완전 달라지는 것들이 많다. 그러면 낱말을 거꾸로 읽으면서 또 세상의 이치를 배우게도 된다. ‘성실(誠實)’하지 않으면 ‘실성(失性)’하고, ‘지금’ 하지 않으면 ‘금지(禁止)’되며, ‘실상(實狀)’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으면 ‘상실(喪失)’의 아픔을 겪을 수 있다. ‘체육(體育)’으로 몸을 단련하지 않으면 ‘육체(肉體)’를 잃을 수 있으며, ‘관습(慣習)’을 타파하지 않으면 나쁜 ‘습관(習慣)’에 얽매여 살게 된다.

‘작가(作家)’로서의 기질을 보여주지 않으면 ‘가작(佳作)’도 탄생시킬 수 없으며, ‘일생(一生)’을 목숨 걸고 살지 않으면 ‘생일(生日)’조차 맞이할 수 없다. ‘세상(世上)’을 똑바로 살지 않으면 ‘상세(詳細)’하게 목표를 설정할 수 없으며, ‘사상(思想)’을 똑바로 세우지 않으면 조금일 망정 ‘상사(上司)’조차도 되지 못한다. ‘사고(思考)’하지 않으면 ‘고사(枯死)’당하고, ‘등대(燈臺)’를 찾는 노력을 포기하면 ‘대등(對等)’한 입장에서 세상을 살아가기 어렵다.

세상의 소음과 '단절(斷絶)'하지 않으면 인생이 ‘절단(絶斷)’날 수 있으며, ‘성품(性品)’을 곱게 가꾸지 않으면 ‘품성(品性)’마저 망가진다. '자살'을 거꾸로 읽으면 '살자'가 되고, '역경'을 거꾸로 읽으면 '경력'이 되며, '인연'을 거꾸로 읽으면 '연인'이 된다. 그리고 '내 힘들다'를 거꾸로 읽으면 '다들 힘내'가 된다. 모든 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렸다. 좋은 생각, 좋은 마음, 좋은 말을 늘 나 자신에 가까이 두고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삶에 균형을 맞추면 쓰러지지 않는다.

한 중국 청년이 무작정 미국으로 향했다. 청년은 미국에 도착하고 얼마 후부터 거리에서 바이올린을 켜며 생활비를 벌었다. 그는 목 좋은 은행 입구에서 흑인 바이올리니스트와 함께 음악을 연주했는데 거리 공연치고 수입이 꽤 괜찮았다. 그는 좋은 수익의 거리 공연에 안주하지 않고 음대 진학의 목표를 세웠다고 한다. 차곡차곡 공연수익을 모아가는 청년. 드디어 음대 진학의 꿈을 이루었지만 안주하지 않고,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을 연마했다고 한다.

10년 후, 그는 유명한 작곡가이자 지휘자라는 자신의 꿈을 이룬다. 그는 어느 날 자신이 예전에 연주하던 은행 입구를 지나다 여전히 그곳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하고 있는 흑인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된다. 그가 다가가 인사하자 흑인 친구가 물었다. “어이, 친구! 요새는 어디서 연주해?” 그가 유명한 콘서트 홀의 이름을 대자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재차 물었다. “거기도 여기처럼 벌이가 좋아?” 그는 “응, 그럭저럭 되는 편이야.” 라고 대답하고 돌아선다.

그가 바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대 음악가’ 중 한 명인 ‘탄둔’이다. 영화 ‘와호장룡’의 음악으로 ‘아카데미 음악상’과 ‘그래미상’을 수상하고, ‘장가계 협곡’을 배경으로 공연하는 중국 3대 뮤지컬 ‘천문호선’의 음악감독이다. ‘안주’와 ‘도약’의 의미를 되짚어보게 된다.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안주’의 사전적 의미는 ‘한 곳에 자리를 잡고 편안히 삶’ 또는 ‘현재의 상황이나 처지에 만족함’이다.

‘도약’의 사전적 의미는 ‘몸을 위로 솟구치는 일’ 또는 ‘더 높은 단계로 발전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두 가지 삶을 놓고 봤을 때 어떤 것이 좋다 나쁘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은 두 번 살지 않기에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오늘 같이 비슷한 일상을 사는 것보다, 오늘보다 나아진 내일을 사는 것이 조금 더 재미있고 의미 있진 않을까?

‘우분트(UBUNTU)’란 말이 있다. “내가 너를 위하면 너는 나 때문에 행복하고, 너 때문에 나는 두 배로 행복해질 수 있다.”라는 뜻이다. ‘아프리카’ 부족에 대해서 연구 중이던 어느 인류 학자가 한 부족 아이들을 모아 놓고서 게임 하나를 제안했다. 나무 옆에다가 아프리카에서는 보기 드문 싱싱하고 달콤한 딸기가 가득 찬 바구니를 놓고 누구든 먼저 바구니까지 뛰어간 아이에게 과일을 모두 다 주겠노라고 했다.

그런데 인류 학자의 예상과는 달리 그 아이들은 마치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서로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손에 손을 잡은 채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과일 바구니에 다다르자 모두 함께 둘러앉아서 입안 가득히 과일을 베어 물고서 키득거리며 재미나게 나누어 먹었다. 인류학자는 아이들에게 “누구든지 1등으로 간 사람에게 모든 과일을 다 주려고 했는데 왜 손을 잡고 같이 달렸느냐?” 라고 묻자 아이들의 입에서는 “UBUNTU(우분트)!” 라는 말이 합창하듯이 쏟아졌다.

그리고 한 아이가 이렇게 덧붙였다. “나머지 다른 아이들이 다 슬픈데 어떻게 나만 기분 좋을 수가 있는 거죠?” 그렇다. ‘UBUNTU’는 아프리카 ‘반투족’의 말로서 “우리가 함께 있기에 내가 있다!” 라는 뜻이라고 한다.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자주 강조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우분트!’, 어디를 가나 일등 아니면 최고를 따지는 세상이지만 아프리카 아이들처럼 모두가 함께 했을 때에 더 커지는 달콤한 행복을 함께 느껴보길 바란다.

당신이 행복하면 당신 주위에 있는 평균 다섯명이 그 날 하루를 함께 행복해 한다는 통계도 있다고 한다. 혼자가 아닌 함께 하는 세상, 필자도 오늘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행복해지고 싶다. 좋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고 싶다. 과연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일까? 좋은 사람이란 삶에 흥미를 잃지 않으면서도 한결같은 사람, 멀리 있으면 한 번씩 생각나는 사람, 아름다운 꽃을 보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떠오르는 사람, 보면 좋고 안 보면 안 보는 대로 잊고 살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불현듯 떠오르면 문자라도 날려서, 엊그제 만났던 것처럼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 말수는 적지만 함께 있으면 유쾌하고 어려움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사람, “아니요.” 라는 말보다 “맞아요.” 라는 말을 자주 하는 사람, 때로는 예쁜 글씨로 손 편지 하나 선물처럼 남기고 가는 사람이 아닐까? 물론 현실적으로는 살기가 참 쉽지 않다. 주변을 둘러봐도 모두들 오늘을 살아가는 모습이 하나같이 버겁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차피 멈출 수 없는 게 삶이다. 힘들면 잠시 나무 그늘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자. 고민해도 달라질 게 없다면 딱 오늘까지만 고민하고 내일은 내일의 삶을 살자.

꿈을 꾸어도 달라질 게 없어도, 그래도 내일부터 다시 꿈을 꾸자. 웃음이 안 나온다고 해도, 그래도 내일부터 그냥 이유 없이 히죽 히죽 웃기로 하자. 힘들다고 술로 지우려 하지 말고, 아프다고 세상과 작별할 생각 말고,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사람을 원망하지 말고, 위기가 닥쳤다고 짜증 내지 말고, 그냥 그러려니 하자. 궂은 일은 빨리 잊어버리고, 좋은 일은 자꾸 자꾸 끄집어내어 길고 복잡하게 기억하도록 하자. 그리고 힘을 내자. 죽을 힘을 다해서 부딪처보자. 두렵지만 이겨내자.

인생은 오늘도 내일도 계속된다. 죽는 순간까지! 우리는 이미, 정말로 힘들고 어려워서 죽을 것 같던 세월도 너끈히 견뎌왔잖은가? 우리들 각자에게 숙명처럼 주어진 ‘론지노의 창’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누군가를 찔러 피 흘리게 할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를 찔러 아파할 것인가? 아니다. 그 보다는 성스러운 이 창을 영원한 신화의 창으로 승화시키고, 마음 속의 성스러운 성물로 간직하는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가꾸어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달성한 우리 삶의 목표에 ‘론지노의 창’을 ‘보물 1호’로 영원히 자리매김하면서 살아가도록 하자. 그게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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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미진 골골마다 몰아쉬는 음습
삐죽삐죽 솟은 쇠창살엔
천년을 이어온 울부짖음,
딱 사랑받은 만큼만 사랑하면서 살아온
숨자락은 적이 인색하여도
핏빛은 여전히 붉어 마뜩해하다가

어처구니 홀로이 머문 피안으로 길을 내
진즉 멀리로 떠나간
론지노의 마즈막 비상창,
설움들 죄다 버무리고는
열대야 비추는 가증스런 낯짝인 양
지붕엔 하이얀 달 곧추섰었지

그리움 깊어갈수록
얼추얼추 헤아릴 길 막연해
그저 깊어가는 바다 속 닮아
감성의 여울 깃들 부활 기둘리더니,
얼마나 큼직한 분노
용암으로 품어 이제껏 살아온 겐지

달빛 부서지는 허공으로
머줍게 실어보낸 바람 그리고 세월,
달막달막 입술 열어
딴에는 개똥철학 콩팔칠팔 읊조리곤
뜬금없이 배시시 입가 매어달려
서글퍼서 차마 상큼한 볼가심

조물주 원망하던 살리에르 질투가
차라리 처절한 몸짓되어
채곡채곡 뇌세포에 그려지는데, 찰칵!
이미 현실은 현실이 아니고
멈춰버린 시간 가운데
한 장 자기공명으로 추억될 뿐

저 하이얀 달은
마음자리 한 가운데 콕 박히어서는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 탓하며
밤 이슥해 시퍼런 궁창,
이내 색바랜 새벽바다가 되도록
속절없이 그 정신과병동만 쓰다듬었지
론지노의 그 창으로
하릴없이 달만 찌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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