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네번째 가상詩集입니다.

2012년 봄부터 씌여진 詩들입니다.
實驗詩적인 성격의 習作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오늘까지 계속 이어져오는 역사의 章입니다.

처음 詩人의 길에 入門한 이래로
이제껏 40년 이상을 지어온 詩이지만 아직도
정확한 詩의 정의를 내리지 못한 채,

판도라의 상자를 가슴에 품어안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풍운아로 떠돌며
詩의 본질을 찾아 헤매고 있는
詩人 林森의 애환이 드러나 있습니다.

林森의 고행은 그래서
지금도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그의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쭈욱 ~~

詩人의 멍에를 天刑으로 걸머지고 있는 한....
[ ]

위로 이동

* 여름밤 빗소리 *



시작노트

" 여름밤 빗소리 " 詩作 note

7월이다.
어느새 초록이 무성하고 볕살 뜨거운 한 여름의 중간에 성큼 다가서있다.
목하 여름비 소란스러울 장마의 계절이 도래했다.
그러고보니 벌써 올 해도 절반을 훌쩍 보내버리고, 하반기의 초입에 접어들은 거구나.
새 해의 계획을 세우고 올 해의 좌우명을 선정하면서 부산을 떨던 것이 엊그제 같거늘 별로 한 것도, 이룬 것도 없이 여섯달을 허청이며 살아버렸다.
하지만 이제까지 살아온 모양새 그대로 남은 절반도 살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라, 새삼 각오를 다지면서 두 주먹을 옹송그려 잡아본다.
절대 올 해의 막바지에서 후회 따위나 하고 있지는 않으리라는 다짐의 표현이다.
그럼 도대체 뭘 어떻게 다잡아서, 또 다른 시작점을 만들어야 하는 걸까?
명료하게 답을 제시할 수 없으니, 따라서 방도를 찾기도 생각처럼 쉬울 리가 없다.
그래도 어차피 살아가야 하는 날들이고, 주관적인 의지와 행동에 따라서 결과는 따라오게 마련일테니 포기하지 않고, 이제부터라도 모름지기 제대로 된 삶의 페이지를 차근차근 적어봐야 할 참이다.
얼마 전 필자가 소속되어 있는 어느 단체에서 ‘국민대통합 마라톤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작은 힘이나마 보태야 할 처지라서 임원진에 이름을 올려놓았었다.
공교롭게도 반환점 근처에서 행사의 진행을 점검하게 되었기에, 그 지점까지 힘들게 달려오는 마라토너들의 상황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날씨도 뜨거운데다가 갈증도 심하게 느껴져서 이미 거의 탈진하다시피 한 표정으로 힘겹게 다가서는 선수들에게 혼자 큰 소리로 응원을 하면서 격려를 보내주었다.
“자! 이제 절반입니다. 지금부터는 달리는 만큼 남은 거리가 줄어듭니다. 파이팅!”
그랬더니 놀랍게도 거의 대부분의 선수들이 밝게 반응하면서, 숨이 찬데도 불구하고 웃으며 같이 “파이팅!”을 외치는 것이었다.
이미 절반의 어려움을 너끈하게 해냈는데, 남은 절반 쯤이야 못할 게 없다는 다짐과 의욕이 솟구치는 듯 보여졌다.
바로 그런 거다.
절반의 의미는 그냥 단순하게 ‘한 가운데’나 ‘반’이라는 것이 아니다.
잘했든 못했든 이미 이룬 과거의 반을 내 속에 담고, 다시 시작되는 미래의 반을 향한 도전과 의지를 내 속으로부터 끄집어내는 엄연한 과정이며 역사적인 전환점이다.
잘된 것에 대한 칭찬이나 긍정적인 평가도 아직은 섣부른 판단이요, 잘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나 부정적인 반성도 어쩌면 때이른 성급함이다.
지금까지의 페이스를 그대로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조금 더 끌어올려 역전의 계기를 마련할 것인가를 잘 선택하여 즉시 실천으로 옮기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세상의 상황에는 절반이라는 의미가 있다.
또한 한 해의 절반이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힘을 내서 남은 절반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라고....

우리 옛말에 ‘경이원지(敬而遠之)’라는 말이 있다.
‘겉으로는 공경하는 체 하면서 속으로는 멀리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세상 물정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이였을 때에는 친구가 아주 많았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친구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든다.
삶이 각박하다보니 마음이 부족하고 생각이 변한 탓이다.
그래서 형식적인, 업무적인 인간관계가 늘어나고 오히려 일회용적 만남들이 익숙해졌다.
덴마크의 위대한 철학자 ‘키에르 케고오르’는 “사람 행복의 90%가 인간관계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경이원지(敬而遠之)’한 만남이 아닌, 마음과 마음이 연결된 만남은 나와 이웃의 행복을 더 풍요롭게 한다.
필자의 경우,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참 어렵게 느껴지고 있다.
굳은 습성들이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다른 사람들과의 어울림에 큰 걸림돌이 되는 것 같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관계를 맺으려면 부딪치고 쓸리고, 그리고 마모되어야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되건만, 나이를 먹어갈수록 그 과정이 번잡하고 귀챦게 느껴져서 미리 다가가기를 포기하게 되고, 또 다가오는 이들이 두렵기조차 하다.
자기 포장에 열심을 내다보면 무언가를 자꾸 감추게 되고, 또 왠지 알고나서 실망을 주게 될 것도 지레 염려가 되기도 하니 이 무슨 아이러니인지 모르겠다.
그걸 다른 표현으로 ‘자기관리’라고들 하던가?
아무튼 어쩌면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그 세월만큼의 순수성을 잃어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꼭 가식이라 매도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포장된 모습보다 더욱 설득력 있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된 모습이란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세월이 주는 덧옷의 무게를 털어내고, 순수의 모습으로 누군가에게 다가가서 서로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우리가 된다면 삶이 참 풍요로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진심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마음을 나누는 만남이야말로 삶의 원동력이 되고 생명의 근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움직이지도 않고, 어떤 기운도 느낄 수 없지만 씨에는 생명이 있다.
그러나 그 안에 생명이 있을지라도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죽어 있는 돌맹이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죽은 것과 같은 씨를 살리는 것은 농부의 손이며, 그 농부의 손길 같은 기적의 만남의 있어서 생명은 탄생되는 것이다.
농부는 온갖 정성을 기울여 땅을 부드럽게도 하고, 적당한 물을 주면서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
씨는 농부에 의해서 어두움이 깊은 땅속에 들어가야 하며, 여린 새싹은 굳은 땅을 뚫고 나와야 하는 고생이 있어야 하고, 좋은 나무로 자라기 위해서는 비바람과 타는 듯한 햇볕의 시련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영혼이라는 씨에 생명을 탄생 시키는 것은 섭리이다.
이해하기 힘든 고생과 시련이 지나가고 나면 어느새 든든히 서 있는 영혼이라는 거목이 보이는 것이다.
바로 인생의 영혼이며 삶의 근원이다.
거목으로 서 있는 영혼을 보는 사람은 세상의 시련과 고생이 결코 힘들지만은 않는 것이다.
이미 다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겸손하게 남을 배려하면서 최선의 만남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오랜 기다림과 성실로 새 생명을 창조하는 농군의 선물같은 삶처럼 말이다.
우리는 매일 다른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많은 선물들을 받고 있다.
가령 선물을 받으면 자꾸자꾸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나 선물을 주었을 때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
우울의 늪에 빠진 사람이 가장 원하는 것은 위로가 아니라 밝은 웃음이다.
자신을 돋보이려고 기를 쓰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는다.
오히려 눈에 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돋보이게 해주는 사람이다.
있을 때는 눈에 띄지 않지만 없을 때는 눈에 띄는 사람이 되자.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은 사람들을 위한 일인가?
아니면 단지 사랑받기 위한 일인가?
모름지기 좋은 친구를 찾기보다 좋은 친구가 되어 주자.
기왕이면 도와줄 사람을 찾기보다 도와주는 사람이 되자.
모두 아는 말이지만 ‘이해한다’는 뜻의 영어단어 철자 ‘understand’라는 것은 아래에 서서 이루어지는 관계이다.
인간관계에 강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아래로 내려간다.
우리가 늘 새겨야 할 말이다.

살아가는 형편이나 모습은 모두들 제 각각이라서, 이름하여 세상의 모든 사물은 천태만상인데, 그 중에서도 유독 글 쓰는 글쟁이들의 모양새는 대체적으로 꾀제제하고 볼썽사나워 냄새를 폴폴 풍기는 경우가 다반사다.
예전에는 나름 인정을 받는 글쟁이들이라면야, 먹고 사는 방편을 마련키가 그리 어렵지 않던 시절도 있었다지만, 요즘은 택도 없는 이야기다.
글은 글대로 쓰면서, 먹고 사는 직업은 따로 번듯하게 지니고 있어야지, 만일 그렇지 않고 골방에 처박혀서 글만 줄창 썼다가는 제아무리 멋드러진 창작을 했다손 치더라도 그야말로 굶어죽기가 십상이다.
사실 시셋말로 글을 쓴다는 일은 돈 생기는 일은 아니다.
따지고보면 뭐 그렇게 재미나는 일도 아니다.
그런데 글쟁이들은 모여서 서로 헐뜯고 시기하고 험담을 하기를 참으로 즐긴다.
추측컨대 그게 그래도 살다보면 그 중에 제일로 재미나는 일이라서 그럴 것이다.
그러다보니 모이고 떠들고 어울리는 것을 상당히 즐긴다.
아마도 그것이 바로 그런대로 심심하지 않은 일이라고 여겨져서 그런가보다.
지난 달에 필자는 새로 만들어진 하나의 모임에 참석했었다.
이름하여 ‘북원 창작문학동인회’.
이른 봄에 얘기가 시작되어 만들어진 모임인데, 몇 번을 소모임으로 진행하다가 그날 공식모임으로는 첫 번째 회동이었다.
사람이 만난다는 것은 가히 기적이라고 표현해도 모자람이 없는 인연의 산물이다.
그 중에서도 생각과 취미가 같은 사람, 또는 같은 재능이 있는 사람끼리 만나서 한 무리를 이룬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같으면서도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들의 만남은 쟁이들의 마음 모음이다.
글쟁이들은 생각이 모나고 편협하다고들 한다던가.
제각기 나름의 영역을 고수하고 있고, 그런 자기의 성들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하나의 다른 테두리 안에 자신의 세계를 자연스레 들여놓는 행위이니 그걸 허물벗기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몇 명 모이지 않아도 시끌벅적하고, 입질이 끊기지 않는 폼새가 역시 머릿속에 글줄깨나 들어있는 쟁이들의 모임이었다.
훌쩍 날밤을 새고 새벽녘 시퍼런 몰골로 해장국을 마주하고 앉아서까지,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문인들을 싸잡아서 비판하고 평론하면서 재미있게 험담을 하고나니, 그렇게 후련하고 속이 시원할 수가 없었다.
오래된 스트레스가 확 풀리고 아예 쳇증까지 쑥 내려가는 통쾌함으로, 우리는 더욱 자주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발길을 돌렸다.
그 자리에서 한국 문학의 미래를 토론하고 후학들의 문학세계에 관한 지표를 설정하면서 근사하고 위대한 만남의 역사를 쌓지 못하고, 고작 남을 헐뜯고 모함하는 입방아나 찧다 왔으면서 무슨 문학동인회냐고 타박을 해도 할 말은 없다.
다만 한 마디는 꼭 변명을 하자.
“잘 써 보려고 그러는 겁니다. 잘 살아보고 싶어서 그러는 겁니다.”

시를 쓴답시고 긴 밤을 다독여봐도, 실상 필자는 늘 슬픈 눈망울로 주눅이 들고, 언제나 바람소리를 키우는 구멍난 가슴은 마음앓이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필자의 벗들도 역시 무엇 하나에도 충실하지 못한 채 항상 자신 없어 하며, 서있는 자리의 흔들림을 오히려 스스로의 철학이라고 여기면서, 뚫린 가슴의 구멍을 메꾸기 위해 다른 사람의 삶 따위는 생각지도 못하는 어설픈 위인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들의 모임이 더 뜨거운 건지도 모른다.
그 모임은 발자국 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살그머니 자신의 길들을 가는, 마음으로 서로의 체온을 감지하는 아이같은 어른들의 모임이었다.
생명이 없는 것들에 생명을 부여하는 특권을 가진 사람들, 젖은 장작에도 활활 불을 지피는 사람들, 한뼘 대나무 조각으로도 기막히게 창조의 소리를 불러내는 사람들이 모여 앉았지만, 병들고 가난하고 소외된, 그래서 서로 위로하면서 기대고 싶어 하는 허리 약한 사람들의 모임이 분명하였다.
그날 모임엔 일곱 명이 모였다.
모두가 가진 것 없는 비천한 사람들이고, 모두가 웃음만 헤픈 사람들이고, 모두가 반 쯤은 미침 사람들이었다.
하나같이 가슴에는 커다란 구멍이 나있는 사람들이어서 문학이라는 끈으로 꿰기만 하면 다듬지 않아도 빛나는 진주 목걸이를 만들어, 목에 걸어봄직도 할 수 있을 듯 하였다.
그러면서도 우린 아무도 구멍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만큼 구멍은 우리의 아픔이고 또한 부끄러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코 우리는 구멍난 자신을 감추진 않는다.
끊임없이 한 알의 모래알을 진주로 키워가는 진주조개처럼 아픔, 슬픔, 희망, 그리움들을 구멍으로 흘려보내 정화된 체액으로 그걸 다 채워갈 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모자람, 채워지지 못한 부족을 사랑하며 돋는 해를 바라보듯 아침을 기다리는 해바라기같은 글쟁이들이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삶이란 구멍메꾸기가 아닌가?
메꾸고 메꾸어가다 종내는 덜 메꾸어진 그 가슴으로 떠나야 하는, 그렇게 인간은 영원한 미완의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미완성의 인생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우리는 오늘의 삶을 사랑하면서 다시 힘을 내게 되는 것이다.

문득 창밖으로 슬그머니 달라붙는 빗방울을 하나 바라본다.
이내 힘을 잃고 아래로 사라져버린다.
희망이 없다면 이별하는 자의 아픔은 저럴 것이다.
빗방울에 빗방울이 포개지고, 예측할 수 없는 곳에서 빗방울이 쏟아져 내리듯이 이별하는 자의 아픔은 저렇게 막연할 것이다.
아마도 필자는 오늘도 구멍난 가슴의 한 복판에서 자신과 싸워야 할 것이다.
그것이 삶이라면 기꺼이 싸우면서 비에 젖을 것이다.
수천 개의 추억이 떨어져 내리고, 뇌우 속에 맨 몸으로 선 것처럼 젖어갈 것이다.
절반의 기억이 젖어가고, 지금의 자신이 젖어가고, 빗속에 절반의 세월이 젖어갈 것이다.
빗방울 위에 손가락으로, 쓰면 금새 지워져버릴망정 다짐의 편지를 쓴다.
말갛게 부서지며 소리 없이 스러져 가는 마음의 편지를 써본다.
비 오는 날, 절반의 흐름은 하나의 숙명처럼 구멍난 가슴 안에 자리잡을 것이다.
절반이나 남은 올 해의 남은 일상을 과연 우리는 어떤 삶의 색깔로 채워갈까?
여름비 내리는 7월의 첫 주간에 던져보는 새 하루의 화두이다.
“잘 들 살아보자구요.”


" 여름밤 빗소리 " 詩作 note 닫기
 | 배경이미지 새로적용  | |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아프긴 싫어도
아픔을 사랑하는 마음이
부르는 소리에 귀 기울이다가,
슬프긴 싫은데
슬픔을 먹고 사는 계절이
춤추는 환상에 눈 얹어지는데

웬만하면
여름 한 철엔
내리쬐는 볕살보다는
저 나리는 비랑 벗트는 게 어때요?

빗속에 맨 몸으로 서서
피차 흉허물 없이
너나들이 하다보면
또랑또랑 먹어가는 계절의 나이

애초에 비는 내 곁에서 속삭이는
여인네의 숨결이었음을....
적확한 마음 한 켠
자리매김된 옛 사연들이
죄다 비로 되어 흩날린다면야

어떤 날은 소낙비였다가
혹은 이슬비 되어 감싸기도 하고
때론 는개비로 살폿
외론 가슴 적시는 밤이면

본래 그 자리 그렇게 서서
내가 비 되고
비는 나 되어져 손 맞잡아
아픔도 슬픔도 사랑하는
소리 환상 들리어나거든

여름밤에 나리는 빗소리라면
마냥 사랑스러울 수 밖에 없지요

 | 배경이미지 새로적용  | | 글자 크게 글자 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