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16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네번째 가상詩集입니다.

2012년 봄부터 씌여진 詩들입니다.
實驗詩적인 성격의 習作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오늘까지 계속 이어져오는 역사의 章입니다.

처음 詩人의 길에 入門한 이래로
이제껏 40년 이상을 지어온 詩이지만 아직도
정확한 詩의 정의를 내리지 못한 채,

판도라의 상자를 가슴에 품어안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풍운아로 떠돌며
詩의 본질을 찾아 헤매고 있는
詩人 林森의 애환이 드러나 있습니다.

林森의 고행은 그래서
지금도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그의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쭈욱 ~~

詩人의 멍에를 天刑으로 걸머지고 있는 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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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넋을 위한 시(詩) *



시작노트

" 어린 넋을 위한 시(詩) " 詩作 note

‘세월호’라는 배가 온 나라를 몰고 침몰한지 어느덧 3주가 흘러갔다.
모든 국민들의 정의도, 도덕도, 윤리도, 양심도, 한꺼번에 따라서 수장시킨 ‘세월호’, 그래서 미래도, 희망도, 꿈도, 사랑도, 모두 얼어붙게 만든 ‘세월호’의 아픔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가슴을 저당잡은 채, 처음 못지않은 절절함과 먹먹함을 만들어가고 있다.
문득, 당시 ‘진도 실내체육관’에서 자원봉사를 하던 한 여대생이 체육관 입구에 붙였다던 대자보관련 기사가 기억난다.
결론은 ‘어쩔 수 없는 어른이 되지 않겠다’는 내용으로, 기성세대의 무능력과 무책임을 비판하는 글이었다는 것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보도를 통해 알고 있다.
예컨대 필자도 예전에는 그렇게 정의로운 젊은이의 하나였던 것 같다.
어른들이 저지르는 악행에 분노하고, 작은 일에도 나의 일처럼 솔선수범 나서면서 목소리를 높이던 오지랖 넓은 피 끓는 청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사십여년이 흐른 지금,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 훨씬 전에 어른이 되어졌고, 그렇게 세월을 보내면서 자꾸만 나이 먹어가는 현실 속에서, 과연 우리의 자식들을 향하여 당당하게 큰 소리치며, 바른 길로 인도하고 있는 떳떳한 어른이라고 새삼 자신할 수 있을까?
생각컨대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일상의 사건 사고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힘겹게 살아가면서, 먹고 살기 바쁘다는 핑계를 그럴듯한 명분 삼아서, 진짜 자격있는 어른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본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이번 참사로 그동안 썩어 고인 물이 수면 위로 드러났지만 비단 이 뿐일까?
이런 부류의 어른들이 저들 뿐이겠냐는 거다.
필자도 예외 없이, 모든 어른들이 처절하게 반성하고 기도해야 할 절박한 시간이다.
물론 지금의 저 대자보 학생도 자라서, 언젠가는 이 사회라는 곳에서 치열한 생존경쟁의 싸움을 하면서 각박한 삶을 살아가게 될지 모른다.
우리 어른들이 정작 해야 할 일은 저 아이들에게, 지금의 이 세상보다는 그래도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서 물려주는 일이다.
지금 엄청난 사고가 터지고 난 뒤인데, 현 정부가 진정으로 국민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면 정말로 국민의 삶과 직결된 문제들을 하나하나 개선해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느새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허기사 일도 해야 하고, 그러려면 먹어야 하고, 사람들과 소통도 해야 하니까 정상적인 일상을 살아가는 것을 뭐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가슴 한 켠에 이렇게 크게 뚫린 구멍이라면, 지금 당장의 잠시 잠깐이 아니라 아주 오랫동안 가슴에 상처로 고이 품어안고, 다시는 결코 이런 일들이 재발되지 않도록 각고의 노력을 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학생이 쓴 대자보를 보고 무슨 말이라도 좀 하려 했으나 딱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고쳐라도 주고 싶었는데 잘못된 말이 전혀 없어서 고개만 숙여졌다.
지금 대한민국의 모든 어른들이 그런 걸 어쩌랴.
정말 미안하다, 얘들아!

어느 마을에 목화농장을 경영하는 네 사람이 있었다.
공동 창고에 수확한 목화를 저장해 놓고, 시장에 내다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지 그 창고에 쥐가 들끓기 시작했다.
목화를 자꾸 물어뜯어서 제 값을 못받게 될 것 같자, 논의 끝에 공평하게 돈을 내서 고양이를 구입하기로 했다.
문제는 막상 고양이를 사고 보니 고양이는 한 마리인데 주인이 네 명인지라, 상의 끝에 다리 하나씩을 나누어 갖기로 했다.
그래서 각자 맡은 다리에 자신의 이름을 표시하고 전체적으로는 공동 소유임을 확인하였다.
어느날 고양이가 다리를 다쳤다.
그 다리의 주인은 정성껏 치료를 해주고 붕대를 감아주었다.
그런데 고양이가 난로 부근에 갔다가 붕대가 풀리면서 그만 붕대 끝에 불이 붙었다.
깜짝 놀란 고양이는 목화더미 속으로 뛰어들었고 급기야 창고에 불이 났다.
순식간에 목화는 활활 타버렸고, 결국 나머지 세 사람은 이 다친 다리의 주인에게 책임질 것을 강요하여 손해배상을 청구하였다.
그러자 혼자만 많은 부담을 갖게 된 이 사람은 너무도 억울한 마음에 재판을 신청하였다.
그리고 재판장의 최종 판결을 보니, “다리에 묶은 붕대가 풀리고 거기 불이 붙은 것은 인정하지만, 그 다친 다리는 못 움직이는데 나머지 건강한 세 다리가 움직여서 목화더미 속으로 데리고 갔으니, 오히려 세 사람이 공범이다.”라는 내용이었다.
누구의 책임인가를 캐묻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누구의 책임인가를 정확하게 밝히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책임 소재가 불분명한 사건이나 사고의 원인을 규명하는 일은, 단순하게 생각해서도 안되며, 그렇기에 결론도 쉽사리 도출해내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또한 어느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의 잘못과 책임만 찾아내서 되는 일이 아니라면, 무한 공동 책임을 일방적인 마녀사냥 식으로, 혹은 우격다짐으로 책임 운운하는 것조차 어불성설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저간의 사정이 대충 그러하다.
우리는 침몰된 배의 승선원들에게 일차적으로 모든 증오와 원망을 쏟아부었었다.
이어서 배의 소유주와 임원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옮겼었다.
급기야 당국과 구조대원들, 심지어는 자원봉사자나 언론, 그리고 성금을 내는 사람들에게까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그렇게 서로서로 손가락질을 하고, 욕지거리를 하고, 타박을 하면서 힘든 시간들을 보냈다.
그러나 이제는 진솔하게 거울을 볼 때다.
거울 속에 서있는 바로 그 사람을 향해서,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퍼부었던 모든 지적을 하고, 삿대질도 하고, 종주먹도 들이대고, 멱살잡이라도 해보자.
그리고 억울하면 실컷 울어도 보고, 처절한 반성과 후회로 불면의 밤을 지새워보기도 하자.
그러다가 진이 빠지고 기운이 쇠하면 주저앉아, 망연자실하나마 진정하면서 좀 쉬어보는 건 어떨까?
그리고난 후라면 슬그머니 다시 일어서자.
다 비워버리고 나서 텅 빈 마음으로 정신을 차리자.
목하 그 다음에 새로 시작하자.
도대체 이 참사가 어떻게 나는 아니고 다른 누구만의 책임이란 말인가?
솔직하게 다 인정하고, 겸허하게 모두 받아들이고, 진정 가련하게 스러진 영혼들 앞에 부끄러움 없는 내일을 만들어서 보여주도록 하자.
그게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속죄하는 행동일 것이다.
그래야만 아주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길일 것이다.

아마존 유역에 사는 원주민들에게 유일한 교통수단은 뗏목이다.
이곳을 방문한 여행객이 강을 건너서 탐사를 가려고 했는데 피라냐라고 하는 식인어들이 득실거려서 도무지 뗏목을 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강가에만 가도 피라냐들이 펄쩍펄쩍 뛰어오르면서 살기를 드러내는데, 뗏목에 올라타면 그 사이로 튀어올라와서 순식간에 사지육신을 물어뜯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아무리 궁리를 해도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도대체 이 미개한 사람들은 이런 강을 건너려면 뗏목 따위가 아니라 제대로 된 배라도 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른단 말인가?
그렇게 전전긍긍하던 그는 결국 마을 사람들에게 강을 건네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흔쾌하게 승낙을 하더니 염소 한 마리를 몰고 뗏목으로 향하였다.
강가에 다다라서 뗏목에 오르자 역시 예상한대로 피라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때 원주민들은 데리고 간 염소를 물에다 힘껏 던졌다.
피라냐들은 삽시간에 그 염소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그들은 유유히 뗏목을 저어 건너편에 도달했다.
원주민들은 ‘건널 수 없는 세상의 강은 없다’라는 엄연한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희생 없이는 생명이 없다’라는 절대 진실도 확인시켜주었다.
문명이 최고조로 발달하고 과학과 첨단공학의 완성으로, 모든 편의를 손 안에 쥐고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지만, 때로는 스스로는 도저히 깨닫지 못하는 숨겨진 작은 진리들이 아직도 숱하게 많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는 말이 있듯이 언제나 내일을 향해 앞만 보고 달린다고 해서 승리자가 될 수는 없다.
옛 것에서 배우고 돌아보며, 해묵은 지식의 터 위에 새로운 탑을 쌓는 것이 진정 슬기로운 행동이면서 깊이 있는 삶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다.
이기주의적인 발상으로 혼자만 잘난 척하거나, 남을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는 처세로는 미래를 기약할 여지가 주어지지 않는다.
비록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다소간의 갈등과 반목이 있다고 해도, 그걸 오히려 반전의 기회로 삼아서 더욱 노력하고 정진한다면, 나아가서는 전진과 발전의 계기가 되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어느 조사기관에서 아주 분위기가 좋은 팀과 아주 분위기가 나쁜 팀, 그리고 적당한 갈등이 있는 팀, 이 세 팀을 대상으로 갈등과 성과의 상관관계를 조사했다.
그러데 분위기가 아주 좋거나 나쁜 팀은 성과가 좋지 않았다.
그리고 적당한 갈등이 있는 팀의 성과가 제일 좋게 나타났다.
그렇다면 갈등이 너무 적거나 많으면 성과가 낮은 까닭이 무엇일까?
우선 갈등이 너무 심하면 사람들은 소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갈등이 너무 없으면 상대 의견에 대해 전혀 부정적인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으로 덮어버린다.
활어를 수송할 때 천적을 함께 넣어야 활어들이 싱싱하게 오래 살 수 있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갈등도 이와 다르지 않다.
적당한 갈등이 있어야 사람들은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다.
하나의 이슈에 대해 새롭게 볼 수 있고, 문제점도 사전에 도출할 수 있는 것이다.
갈등이 있어야 이를 해결하기 위한 아이디어가 나오고 창의성이 촉발된다.
성공적인 조직이 되려면 어느 정도의 혼란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2008년에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였다.
똘똘 뭉친 팀워크의 대명사였던 이 회사가 무너진 것은 바로 팀워크 때문이다.
1994년 취임한 CEO ‘딕 펄드’는 무조건적인 팀워크와 협동을 강조했다.
일체의 불화를 용납하지 않았다.
당연히 직원들은 싸움을 하지 않았고 어떠한 반론도 제기하지 않았다.
특히 껄끄러운 문제는 공론화하지 않았고 위기 신호가 와도 나 몰라라 했다.
팀워크가 오히려 궁극적으로는 독이 된 것이었다.
건강한 갈등이 있어야 조직의 혁신이 가능하고 사회의 발전이 기대된다.
씨름하면서 싸울만한 가치가 있는 문제를 제기하고, 그 싸움이 긍정적인 미래를 여는 단초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패배한 쪽에게도 다른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그렇게 같이 나아가는 세상이 되어져야 할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자기중심의 잣대로 판단하므로 생기는 것이다.
개구리는 연못이 운동장이고, 올빼미는 밤이 낮이고, 지렁이는 땅 속이 갑갑하지 않다.
상대의 입장에서 헤아릴 때 닫혔던 문도 열리고, 함께 사는 길도 열리게 된다.
예기치 않은 돌발 상황이거나, 당연히 화를 내야 하고 언성을 높여야 하는 경우라고 판단될지라도,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결과도 달라진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행복 디자이너, 행복한 강사로 유명한 ‘최윤희 씨’는 하루하루 스케줄이 빼곡하게 차 있어
정신없이 뛰어다닌다.
한 번은 다음 장소로 급히 이동하기 위해 강연 전에 콜택시를 예약했다.
그런데 강연이 늦게 끝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약속한 시간이 한참 지나서 택시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게 되었다.
택시 기사는 서서히 짜증이 쌓여, 어떤 사람인지 면상이나 보자는 식으로 기다렸을 것이다.
그런데 까칠한 표정의 택시 기사에게 그녀가 허겁지겁 달려와 날린 한 마디.
“내 평생 나를 이렇게 오래 기다려준 남자는 기사님이 처음이세요! 정말 고맙습니다.”
화를 내려던 기사는 오히려 붕 뜬 기분이 되었다.
휘파람까지 불며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었다.
꾸밈없고 자연스러운 그녀의 유머는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한 편으로 기분 좋게 만드는 탁월한 매력을 갖고 있다.
그녀는 ‘때문에’를 ‘덕분에’로 바꿔 생각할 줄 아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는 단순히 사건의 인과관계와 사실을 바탕으로 펴는 논리다.
‘때문에’가 들어가는 화법은 “강연 때문에 늦었으니 이해해 달라.”
“비용 때문이라면 더 계산해 주겠다.” 등 나를 정당화하기 위한 상황설명을 늘어놓게 된다.
반면 ‘덕분에’는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한다.
그리고 분위기를 기분 좋게 이끈다.
“당신 덕분에 늦지 않을 수 있어서 고마워요.”
“당신 덕분에 강연을 성공적으로 끝마칠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배려받고 있다는 마음에 화는 눈 녹듯이 사라지고, 상대방도 배려의 마음을 품을 수 있게 된다.
우리의 몸에 힘이 있듯이 마음에도 힘이 있다.
우리 몸은 음식으로 힘을 얻지만 마음은 생각으로 힘을 얻는다.
좋은 생각은 마음의 힘이 된다.
사랑, 희망, 기쁨, 감사, 열정, 용기, 지혜, 정직, 용서는 마음을 풍성하고 건강하게 한다.
하지만 미움, 거짓, 불평, 의심, 염려, 반목, 후회는 마음을 약하게 하고 황폐하게 한다.
‘존 러스킨’은 “마음의 힘에서 아름다움이 태어나고, 사랑에서 연민이 태어난다.”고 했고,
‘스피노자’는 “평화란 본래 싸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힘으로부터 생겨난다.”고 했다.
우리 마음의 좋은 생각이 결국 우리를 아름답게 하고 삶을 평화롭게 한다.
생각도 훈련이라는 것을 꼭 명심하자.
그래서 우리는 생각을 스스로 컨트럴하는 훈련을 해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생각도 습성이 되게 된다.
생각에 깊이 빠지다 보면 그 생각에서 헤어나오지를 못하게 된다.
나쁜 생각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
필자의 경우는 그럴 때면 스스로를 많이 껴안아주곤 한다.
어린아이를 껴안는 것처럼 말이다.
말하자면 필자만의 마인드 컨트럴 같은 것이다.
마음은 표정을 만들고, 그 표정이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도, 또 나쁘게도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모두 굉장한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으니 말이다.
기왕이면 주변을 기쁘게 하는 데 그 능력을 한 번 사용해 보도록 하자.
이제부터라도 서로 탓을 하기 보다는 보듬어주고 감싸 안으면서, 적당한 갈등을 버무려 꿈을 만들고, 반성과 후회를 반죽하여 새로운 소망의 밑거름으로 삼아, 이 나라를 또 한 번 깨우는 데 앞장서보자.
그럼으로 우리나라는 저력있는 나라라는 것을 세상에 다시 보여주자.
확실한 반석 위에 우리나라를 다시금 올려놓는 데 우리의 굉장한 능력을 모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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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저 너른 시절
두루마리삼아 일몰 살아가는
외론 길손의 사람살이들

형용 못할 속사정 항계망계 모두어
마침표로 갈무리하곤
겨우겨우 남겨진 석양빛살에
스산히 긴 그림자 드리울 제

애매무지로 갈라놓은 인연끈
설운 정념 흘리듯 버무려
네게 올려보내는 전언(傳言),
이 한 마디 뿐이었네라

네 어머니 자궁 빼닮았을
하늘품 거기서라도 제발
평안의 쉼 오래오래 누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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