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16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네번째 가상詩集입니다.

2012년 봄부터 씌여진 詩들입니다.
實驗詩적인 성격의 習作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오늘까지 계속 이어져오는 역사의 章입니다.

처음 詩人의 길에 入門한 이래로
이제껏 40년 이상을 지어온 詩이지만 아직도
정확한 詩의 정의를 내리지 못한 채,

판도라의 상자를 가슴에 품어안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풍운아로 떠돌며
詩의 본질을 찾아 헤매고 있는
詩人 林森의 애환이 드러나 있습니다.

林森의 고행은 그래서
지금도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그의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쭈욱 ~~

詩人의 멍에를 天刑으로 걸머지고 있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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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도를 강권하는 사회 *



시작노트

" 효도를 강권하는 사회 " 詩作 note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東邦禮義之國)’이라 지칭되어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예를 숭상하는 나라로 손꼽혀왔다.
이는 일찍이 중국인들이 우리나라를 가리켜 ‘예의가 바른 민족의 나라’라고 평했다는 데에서 근거한 말로, ‘산해경(山海經)’에 의하면 중국인들은 우리나라를 ‘해 뜨는 동방의 예의지국’ 또는 ‘군자국(君子國)’으로 일컬었다.
중국 ‘요순시대(堯舜時代)’에 ‘공자’는 자기의 평생 소원이 “뗏목이라도 타고 조선에 가서 예의를 배우는 것”이라고 하였다 한다.
중국인들은 그래서 우리의 민족성을 가리켜 ‘어진 사람[仁人]’이니 “사양하기를 좋아하여 다투지 아니한다[好讓不爭]” 혹은 “서로 도둑질하지 않아 문을 잠그는 법이 없고, 여자들은 정숙하면서 믿음이 두터우며 음란하지 않다”고 하며 칭찬해 마지 않았다.
언제 시작된 유래인지 정확하지는 않으나, 그 중에서도 역사상 수많은 사례와 근거를 실질적으로 착실하게 쌓아오면서, 우리의 전통으로 굳어진 대표적인 사상이 ‘나라와 부모에 대한 충효의 사상’이며, 이것이 바로 우리의 정신에 깊이 깃들어있는 예의 근본이다.
중국의 영향으로 유교문화가 발달하였던 우리나라의 경우, 이른 시기부터 ‘충효사상’이 사회통합과 국가의식을 공고히 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근대 이후 서양 문물을 접하게 되고, 특히 8·15 광복 이후 자유·평등을 기치로 하는 민주주의적 사고방식이 지배함에 따라 재래의 전통적 윤리규범은 ‘전근대적 봉건도덕’이라 하여 부정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삼강오륜(三綱五倫)’ 가운데 특히 부자·군신의 관계를 규정하는 덕목인 ‘효(孝)’와 ‘충(忠)’은 민주주의 정신에 반하는 ‘가부장적 봉건도덕(家父長的封建道德)’으로 타파의 대상이 되다시피 했다.
그렇지만 ‘충효사상’은 그 시행 과정에서 일정한 역기능적 요소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나, 자기 일신의 이해관계를 떠나 부모와 국가에 헌신하려는 자세는 민주시민 사회의 공동체를 위해서도 여전히 중요한 덕목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현대에 들어 ‘충효사상’은 ‘전근대 사회에서 개인이 집단에 예속된 존재의 증거로, 자주성을 상실한 노예의 덕목’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효는 가부장에 대한 맹목적 복종을, 그리고 충은 같은 문맥에서 군주에 대한 무조건적 헌신을 뜻한다는 것이다.
사실 ‘충효사상’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헤겔(Hegel, G. W.)’이나 ‘베버(Weber, M.)’같은 서양의 철학자나 사회학자들에 의해 강력하게 주장되어왔다.
그들은 동양사회를 일인 전제국가로 규정하고, 무한한 복종을 뜻하는 ‘효사상’이 그대로 군주에 대한 충성으로 이어진 것은 충효의 윤리를 정치교육과 교화의 맥락에서 도구화한 것이라고 인식하였던 것이다.
충효를 이처럼 부정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서양인들의 일반적 동양관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시각은 오늘날에는, 자기의 전통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이 서양인의 관점을 일방적으로 교육받은 현대의 동양인들에게도 널리 퍼져 있다.
요컨대 전통사회는 전반적으로 권위주의적 요소가 짙었으며, 그러한 체제를 용인하여 방조하고 합리화하였던 가장 대표적인 요인을 ‘충효사상’에 돌렸던 것이다.
‘충효사상’이 상하 계층의 신분질서를 기초로 한 과거 가부장적 봉건사회의 지배·복종 관계에 기반해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일방적인 지배와 맹목적인 복종 관계로 파악해서는 안된다.
충효는 부(父)에게 효도하고 군(君)에게 충성하라는 뜻이지만, 그것은 부당한 처사에 불복하고 비합리적 명령에 항거하는 정신을 핵심적 내용으로 포함하는 것이었다.
효도란 사랑[仁愛]에 근본하고 있는데 부모는 자식에 대해서 ‘자(慈)’를, 자식은 부모에 대해서 ‘효(孝)’를 다하는 것이니 이는 모두 어진 마음[仁]의 나타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동양사회는 고래로 부모들의 자녀에 대한 사랑이 유별나다.
공자는 “자식이 세상에 태어나서 3년이 지나서야 부모의 품을 면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자녀는 실제로 부모의 자애와 엄한 교훈 속에서 양육된다.
그러므로 의무나 예법이 주어지기 전에 생활 속에서 부모의 사랑을 체험한다.
만남으로써 기쁘고 헤어짐으로써 슬픈 것은 인간의 상정(常情)이다.
그러므로 부모는 “오직 병으로 앓지 않을까를 근심한다”고 하는 것이며, 자식을 잃어버린 이상의 슬픔이 없다면서 이를 ‘참척(慘慽)’이라고 불렀다.
그런 부모에 대해 자식이 정성과 효도를 다해 모시는 것은, 또한 그렇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어버이의 자녀에 대한 사랑과, 자녀의 부모에 대한 효도는 무엇보다 자연스러운 인간성의 발로이며, 가장 건전한 사랑의 체험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떠나서는 쉽사리 허탈에 빠지며 삶의 의의를 상실하기도 쉽다.
그런데 이렇듯 지극히 당연하고 이견의 여지가 없는, 효도에 관한 정의와 개념에 언제부터인가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근본적으로는 다른 주장이 없는데 현실적으로 속을 들여다보면, 행함에 있어서 이제껏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이상한 형태의 현상들이 속속 보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공식처럼 굳어있던, 당연히 자녀는 부모에게 복종하고, 어떠한 여건에서도 무조건 효도해야 한다는 생각들이 시대적 변화에 따라서 색깔을 달리하여 곳곳에서 드러나게 되었다.
급속도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격랑의 틈바구니에 끼어 미처 적응하지 못하고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조화롭지 못한 사회적 병폐들이 마치 새로운 문화나 시대적 트렌드인 양 여겨지는 사례들이 빈번하게 속출되고 있으며, 특히 더 우려되는 것은 그러한 비정상적인 형태에 우리가 알게 모르게 세뇌되고 적응되어져 간다는 사실이다.
가분수적 인구분포 상황으로 급격한 노령화사회가 도래하면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세대간의 갈등이나, 지나친 물질만능주의의 산물인 빈부간의 격차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각박하고 피폐해져가는 정신과 마음의 그릇에, 우리의 전통을 권장한다거나 문화를 숭상하는 개념 따위는 담을 공간적 여유가 없어져가는 것이다.
기성세대의 보편화된 의견을 들어보면 요즈음 젊은이들은 버릇이 없고, 예의도 모르며, 하나같이 자기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었다고 한탄한다.
그리고 잘못되어진 사회 분위기나 국가적 동요상황 등에 관한 원인과 이유를 젊은 세대의 무지나 불찰로 돌리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나 책임이나 추궁을 앞세우기 전에 꼭 짚어보아야 할 것이 있다.
과연 기성세대가 지금 탓하고 있는 그 젊은이들은 도대체 누구의 자식이며, 누구의 가정에서 양육되었고, 누구의 교육환경으로 길들여져서, 누가 만들어놓은 사회의 제도와 법규 테두리에서 성장하여 오늘날의 그들이 되었다는 말인가 ?
이를 악물고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려온, 휴식도 반성도 점검도 없이 그저 고속성장만을 추구하면서 살아온, 조금은 가련한 기성세대의 삶의 그늘에는 잠재적으로, 또는 필연적으로 숨어있는 어두운 그림자가 자리함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또한 그 그림자를 가슴에 안은 채 살아가야 하는 숙명을 지니고, 태생적인 혼란을 품은 상태로 태어난 우리의 자식들에게 손가락질과 원망의 부담만을 떠안겨서는 안될 것이다.
요즈음의 젊은이들은 가뜩이나 경제적 여건이 원만하지 않아서 취업·결혼시기가 늦어져 불안한데, 사회적 기대수준은 점점 증가해 부담이 심하다고 토로한다.
국가의 제도나 제반 환경 여건들이 젊은 세대들의 복지나 성장에 포커스를 맞출 수만은 없는 게 현실이고 보면, 그들이 안고 있는 고민이나 걱정이라도 귀 기울여야 한다.
일전에 몇몇 젊은이들과 격의없는 대화를 하다보니,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입장에서 가슴이 먹먹해진 적이 있다.
어느 젊은 여성은 “내 20대는 핍박받고 험난했다. 결혼은 하고 싶은데 돈도 없고 노력해도 인연은 안 나타나고, 시간이 갈수록 조바심이 들었다. 한국에서는 여자가 나이 들어가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나 ? 스스로 의식해서 부담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고 고백했다.
물론 젊은이들이 모두 우울감을 느끼는 건 아니다.
“뭐 별 거 있냐 ?”는 쿨한 반응부터 “인생은 서른부터니까”라는 기대감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이들이 공통적으로 토로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미래에 대한 불안’이다.
어떤 젊은이는 “곧 어른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뭐가 되기는 커녕 차츰 아무 것도 되는 게 없는 현실을 발견할 뿐”이라고 젊음의 방황을 정의한다.
또 다른 젊은이는 “우리는 일반적으로 현재의 나이를 중요하게 거론하지 않지만 미래에 대한 압박감이 커져가는 건 사실”이라며 “결혼과 돈, 직장에 대한 고민이 현실화되고 깊어진다”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무거운 부담은, 애석하게도 현실적으로 오늘을 잘 살아내기가 참으로 버겁다는 것이었다.
근면성실하게 열심을 다해 노력을 하면 다 되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만 가지고는 안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변화무쌍한 이 현대사회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고, 조금도 여유를 가질 수 없는 위기의식으로, 전쟁하듯이 살아야 하는 젊은이들에게 맹목적인 효도를 강권하기 보다는, 이해와 아량과 격려의 손길을, 그리고 따스한 관심과 자애로운 품을 벌려주는, 진정한 어버이다운 마음자세가 지금이라면 최우선적으로 필요한 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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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삼의 '살며 사랑하며'
에세이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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