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네번째 가상詩集입니다.

2012년 봄부터 씌여진 詩들입니다.
實驗詩적인 성격의 習作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오늘까지 계속 이어져오는 역사의 章입니다.

처음 詩人의 길에 入門한 이래로
이제껏 40년 이상을 지어온 詩이지만 아직도
정확한 詩의 정의를 내리지 못한 채,

판도라의 상자를 가슴에 품어안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풍운아로 떠돌며
詩의 본질을 찾아 헤매고 있는
詩人 林森의 애환이 드러나 있습니다.

林森의 고행은 그래서
지금도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그의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쭈욱 ~~

詩人의 멍에를 天刑으로 걸머지고 있는 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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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이 사랑하는 법 *



시작노트

" 시인이 사랑하는 법 " 詩作 note

필자는 60여 평생을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왔다. 아니다. 아주 어려서야 아직은 그 이름이 있었던 것이 아니니까, 철 들고 자각을 하고난 이후 물경 50년 가까이라고 해야 맞을 성 싶다. 물론 시인이라는 것이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므로, 그동안 숱하게 생계수단은 바뀌었을테지만, 그래도 ‘림삼(林森)’이라는 필명을 사용하여 오랫동안 시를 짓고, 각종 칼럼이나 사설 등을 쓰며, 오피니언 활동을 하다보니 지금에서는 필자의 본명은 모르는 채 필명으로 인지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많을 정도다.

실제로 어떤 경우에는 인적사항을 작성하다가, 무의식 중에 본의 아니게 필자는 성명란에 본명 대신 필명을 쓸 때도 간혹 있다. 그렇다고 엄청난 족적을 남긴 잘난 시인의 반열에 이른 것도 아니고, 그저 무명소졸에 불과한 필객이지만, 그냥 평생에 걸쳐 우리 글을 사랑하고, 우리 말을 아껴왔다는 데에 나름 긍지와 보람을 느끼면서, 지금도 이리 살고 있다.

필자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이라는 화두를 사랑한다. 시시때때로 사랑을 주제로 하여 쓰고 말한다. 세상에 사랑이 없다면 아무런 희망도 꿈도 존재하지 못하며, 내일의 기대나 바람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가 태초부터 영원까지 이어가야 할 덕목이 곧 사랑이며, 언제 어떤 상황에서라도 기억해야 할 의무가 사랑이라는 생각이다.

사랑이라는 말은 광범위하고 무한한 것이라서 콕 집어서 정의할 수는 없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사랑은 사람을 아름답게 하고 들뜨게 만드는 마술이다. 사랑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지표이며 근원이다. 사랑은 사람이 사람이기에 지니게 되는 다양한 내면적 속성을 모두 평화로 어우르는 기적이다. 영원 불멸의 찬란한 역사다. 그래서 필자가 시인의 이름으로 외치는 사랑은 위대하다. ‘시인이 사랑하는 법’은 종국에는 우리 모두의 것이기에.

오늘은 시작노트의 주제를 광범위한 ‘사랑’으로 설정하지만 내면적으로는 몇 가지 주제로 한정하면서, 그 미증유의 세계를 잠시 엿보고자 한다. 국적불명의 말과 글이 횡행하는 작금의 우리 젊은 세대의 문화적 실상과 실정을 볼 때, 무분별한 유행에 만연된 세태에 그냥 무조건적으로 녹아들어서는 곤란하다. 어차피 누군가는, 작은 일이나마 자부심과 책임감을 갖고 우리의 얼을 지키며, 사명감으로 우리 문화를 기억하면서 나라 사랑, 민족 사랑의 한 축을 기꺼이 담당하고자 하는 애국의 마음을 지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필자라고 해서 억울할 일은 없다. 아니, 오히려 그런 일과 관련한 삶의 모습을 견지하고 있다는 건, 외람되지만 자랑스럽고 가슴 뿌듯할 일이다. 다만, 그런 생각 자체가 우리 국민 전반에 걸친 보편화된 생각이 아니고 너무나도 소수에 극한되면서, 극히 일부 계층에서만 집착하고 있는 고리타분한 구습이거나, 도태되어져야 마땅할 케케묵은 관습 정도로 치부되어질까봐, 오히려 그게 겁이 나고 우려된다.

우리의 얼은 우리의 말에서 비롯된다. 우리의 문화는 우리 글에서 시작된다. 우리의 역사는 우리가 빚어가야 할 우리의 넋이며, 우리가 기려야 할 혼이다. 지금도 필자는 여러 분야에서 글을 쓰면서 지면을 통해, 또는 세미나나 각종 강연 등을 이용하여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우리의 정신 문화에 대해서 주장하곤 한다.

그러나 필자가 피력하고자 하는 문화는 거창하고 대단한 범주의 전문 분야가 아니다. 특별한 사람들이 연구하고 계승 발전시켜야 하는, 어려운 학식과 고견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세부적인 실천 항목이 아니다. 그저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 녹아있는 삶과 인연의 이야기들이야 말로, 추구하는 작은 목표와 꿈들이 한 데 어우러지고 조화되어 만들어지는 사랑의 행적들이야 말로, 우리 모두에게 골고루 퍼지는 소망의 내일을 바라며 앞으로 전진하는 결집된 힘이야 말로, 진정으로 사랑하고 아껴야 할 우리 마음 속의 소중한 자산이며 그것이 곧 우리의 정신 문화라고 하는 생각을 갖고 있을 따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는 특정한 몇 사람의 과제가 아니고, 우리 국민이라면 모두가 늘 염두에 두어야 마땅할 전체의 숙제이며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 말을 연구하는 학자나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층,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소설가나 시인이나 작가들에 한정된 부류, 각급 학교의 교사나 언론인 등의 특정한 계층들만이 지고 나가야 할 지업적인 멍에가 아니라는 말이다.

필자는 예전 어느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시인과 보통 사람과의 구별을 해달라는 요청에 이렇게 대답했던 적이 있다. “그냥, 시는 삶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나 주어져있는 게 삶이듯이 누구에게나 마음 속에 시는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시인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세상의 누구나 시인이지요. 특별히 시의 세계에 가깝게 접근한 직업을 갖게 된 시인들이, 바로 시심을 그대로 표현해내고 시어를 나열하는 재주를, 직업 시인이 아닌 사람들 보다 조금 더 갖고 있다는 차이점만 존재한다는 거지요.

바꾸어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이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조금만 노력하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시심을 겉으로 드러낼 수 있는 자격과 자질을 지니고 있느니만큼, 제가 바라는 건 이 어렵고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시인의 마음을 부활시키고 시인의 모습을 되찾게 하기 위해서, 누군가가 어떤 방법을 찾아야하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시는, 새삼스럽게 예찬을 하고 천거를 하고, 심도 있게 지칭하여 다루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당연한 우리 자신의 모습과 생활의 단면이니 만큼, 마치 향수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고향을 찾듯이, 인간성의 회복을 위해서 찾아야 하는 과제라고 여기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의견도 곁들였다. “정보사회나 IT문제 등은 제가 다룰 수 있는 분야가 아니고, 첨단 세대도 아닌 바라서 감히 평을 할 수 있는 범주는 아닙니다. 단지 모든 것이 편리해지고 상상 외의 문화 혜택을 받는 최첨단의 사회에 살고 있다 보니, 현대인들이 잊고 있는 문제가 있어서 문외한인 제가 느끼기에도 안타까운 부분은 있습니다.

기계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져가는 대신 그만큼 왠지 모르게 인간 본연의 인간성은 상실되어져 가고, 더불어서 인격이나 인권의 문제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거꾸로 퇴보하는데, 사람들이 그 부분은 간과하는 듯 하고, 거기에 따라서 마치 좀이 슬듯이 인간의 존엄성도 사람들이 아울러 스스로 파괴해 가는 듯 합니다. 점점 더 편리한 문명의 이기에 모든 걸 집착하게 되고, 그렇게 기계와의 친밀도나 친숙도에 따라서 사람의 가치 척도가 재정립 되어져가는 것 같아서 조금 서글퍼집니다.

비단 기계 자체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나치게 편의위주, 속도위주, 기능위주의 삶을 추구하다 보니 오래 전부터 이어져오는 우리나라의 역사와 전통, 심지어는 우리 민족 고유의 문화나 언어 문제에 이르기 까지 그 정통성을 잃어버리고, 온갖 저급한 언어들이 혼합되어 마치 뿌리 없는 나무처럼 흔들리고 있는 실정이 곳곳에서 눈에 띕니다.

정치권이나 사회 지도층의 인사는 물론이고, 우리의 참된 가치관과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지도 편달해야 하는 교육 기관이나 언론사에서조차 그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앞 다투어 마치 그렇게 하는 것이 미래 지향형의 선구자적인 포석인 양, 그 폐해를 인지하지도 못하고 되레 선도를 하고 있으니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렇게 가다보면 어느새 우리는, 예컨대 국적불명의 언어를 사용하는 인종 불문의 국민이 되어, 주체성도 가치관도 상실한 채로 혼란의 도가니에 침몰하게 될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제가 바라기에는 좀 더 큰 조직이나 단체, 나아가서는 국가 차원에서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방안을 연구하는 인적 물적 투자가 시급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결론을 이렇게 제시했었다. “추후 좋은 기회가 찾아오면 지금보다 진일보하여서 우리의 우수한 한글과, 한국어에 관한 ‘뿌리 찾기’나 ‘뿌리 지키기’라는 작업에 도전해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강연이나 대담을 통해서일 수도 있고, 기고나 학술적인 집필을 통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더 늦기 전에 누군가는 해야 할 과제인 것 같습니다.

지금처럼 이상야릇한 언어가 횡행하는 시대에 편승하여 적당히 표현하고, 대충 맞추어 시를 쓰면 되지 구태여 문화와 사회의 발전에 거슬러, 외로운 지킴이 역할을 스스로 자임하는 게 무슨 대단한 사명감이며, 도대체 무슨 빛이 나는 책임감이겠는가 하겠지만 말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우리의 말과 글이 우리 국민들에게조차 외면당하고 있는 이 실정에서 어찌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노벨 문학상은 물론 해외의 유명한 심사기관 등에서도, 품격 높은 한글로 만들어진 우리 작가들의 작품이 올바르게 평가되어지고, 그 우수성에 진심으로 매료되어 감탄과 감동을 마다하지 않는 그날까지 우리의 이 아름다운 국어는 갈고 닦고 다듬어져야 합니다.

올바른 우리 말과 글을 표현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우리 후손들의 나라가 ‘대한민국’이라고 계속 불리워질 수 있을 거라고 누가 섣불리 장담할 수 있을까요? 언론인이나 문학인들, 그리고 교육자나 정치가 등이 한 층 더 분투해야 할 때입니다. 물론 더불어서 모든 국민들의 대오각성과 깨달음을 통한 거듭나기를 강력 촉구하는 바입니다.”

돌이켜보건대 평생을 시인의 삶으로 살다보니 이런 저런 면에서 제약도 한계도 참 많기도 했다. 이른바 그 지난한 길을 굳건하게 감내하면서 걸어온 것 같아서 스스로도 대견스럽다. 시인이라서 참아야 했던 욕구도, 시인이기에 거절해야 했던 이익도, 시인이기 때문에 되돌아서야 했던 영광도, 평범치 않은 시인의 생각이 이질감으로 작용되면서, 또한 시인의 그 외로운 길을 고집하면서 뒤집어쓴 오해나 질시도, 기억하기에는 퍽 여러 번이었던 듯 하다.

그 숱한 편견과 관심과 감시를 극복하며 오늘까지 걸어왔다. 그 흔한 욕설과 손가락질과 따돌림을 견디면서 이날까지 흘러왔다. 허기사 그것이 곧 다른 보람이나 기쁨은 아예 없었다거나, 아무런 의미도 없는 버거운 굴레이며 오로지 비참한 십자가의 길이었다는 건 아니다. 비단 다른 사람들의 일상과 좀 이질적인 성향이라서,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착각한 데서 얻게 된 속박이나 원망이나 오해가 다소간 있기도 했지만, 단적으로는 후회할 일도 한탄할 일도 아니다.

스스로 옭아 맨 양심과 정의와 목적이었기에 다른 누구를 탓하거나 핑계를 대자는 의도도 역시 아니다. 단지 기준과 판단의 근거가 너무나도 뚜렷하고 올곧아서, 때로는 주변의 분위기나 여건에 녹아들지 못하고, 혼자만의 아픔과 슬픔을 드러내지 못하며 구석진 곳에서 홀로이 상처를 어루만지고, 기억을 곱씹으면서 불면의 나날을 지새야 했던 밤들이 참으로 많았기에, 거기 따른 부수적인 사연도 엄청 많으리라 여겨질 따름이다.

문득 지나고 보니, 가늠할 길 없는 그 업보가 하냥 불쌍하고, 진실한 목표는 찾지도 못하고 헤매 돈 보헤미안의 삶이, 새삼 보고 느끼기에 마냥 허허롭다는 심사를 표현함이다. 허기사 남 다른 그 흔적과 상처들이 반죽되어지고 빚어져서 물경 시가 되고, 글이 되고, 많은 이야기들이 되었으니, 그 또한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그것이 결국은 시인의 숙명이며, 그래서 별 수 없는 인지상정이었다고 여길 수도 있겠다.

힘든 체험과 습득으로 쓴 육필들이라서, 당사자가 아니면서도 자연스레 맛보게 되는 한도 많고, 어두운 단면을 직접적으로 그린 고백들이라서, 음습하며 질척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아마도 그래서 더 애착이 가는 것일 테고, 해서 필자는 실상 자신의 시와 글들을 무던히도 아끼고 사랑한다. 필자의 시와 글을 읽는 독자들을 사랑한다. 필자 자신인 것처럼 사랑한다. 곧 필자와 독자들은 사랑에 닿아있다. 보이지 않아도, 느끼지 못해도, 만날 수 없어도, 사랑은 사랑이다.

보여지는 겉모습에 의존하지 않고 혜안으로 사람을 느낄 수 있다면, 가슴으로 사람을 지킬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아름다움이 사라지거나 상대방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소멸되거나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사랑이라면 무한 세월이 흐른다 해도, 상대방이 곁에 없어도 변질되지 않을 것이다.

무지개 같은 환상의 아름다움과 노을빛의 숭고함이 깃든 세월의 언저리에서 꿈의 빛깔을 볼 때면, 순간적인 시력에 의존함이 아닌 영혼의 깊은 울림에서 사랑을 느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비탈진 세월의 양지에서도, 그 세월의 언덕 후미진 음지에서도 피어나는, 서로 다른 사랑의 아름다움이 자란다는 걸 알게 되는 날들 속에서, 우리는 간혹 역류하는 숱한 감정들을 어떻게 다스리며 살아가야 할까?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일이며, 행복하기 위한 가파르고 힘든 고개길을 넘어가는, 만족을 향한 길이 아닐까 한다. 또한 작은 것에서 오는 마음으로 느끼는, 비워진 마음으로 헤아리는 아름다움이 있기에, 늘 행복하게 느끼며 살아내는 건 아닐까 한다. 아주 작은 것에서 잔잔한 기쁨이나 고마움을 누릴 때, 마음의 깊은 저 안에서 향기처럼 피어나는 행복이라면, 진정 삶의 질이 달라지게 하는 행복이 아닐까?

기나긴 인생길의 결승점에 일등으로 도달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억누르기 보다는, 비록 조금 더디 갈지라도 힘들어하는 이의 손을 잡아당겨주며 함께 갈 수 있는 사람, 받은 것들을 기억하기 보다는 늘 못다 준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다. 사랑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이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사람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꽃을 피우며 산다. 웃음의 꽃을 피우기도 하고, 분노의 꽃을 피우기도 하고, 절망의 꽃을 피우기도 한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사랑의 꽃을 피우기도 하고, 남들을 불행의 도가니로 몰아가는 미움의 꽃을 피울 수도 있다. 우리가 피운 그 꽃은
저마다의 향기를 내뿜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우주의 기억으로 남는다.

우리가 하는 생각 하나 하나,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우리를 사로잡아, 보이는 세계의 현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분노와 절망의 꽃은 우주 속의 동일한 에너지를 함께 불러오고, 기쁨과 희망의 꽃은 그러한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을 통해 기쁨과 희망을 계속 만들어 간다.

시인이 피우는 꽃은 사랑의 꽃이다. 시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잃었던 평화와 행복을 되찾아 심어주고, 시 속에서 잊었던 추억과 고향을 선사해주는 사랑의 꽃이다. 그래서 시인은 시를 통해서 사랑을 전파한다. 시인이 사랑하는 법은 사랑을 전해주는 법이다. 그러므로 작은 사랑을 전해주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작은 사랑부터 기꺼이 실천하고자 하는 뜻을 갖고 있다면, 그런 작은 사랑의 꽃을 피우고 싶은 진심이 싹튼다면, 그 사람이 바로 시인이다.

필자는 오늘 당신에게 질문한다. “당신은 오늘 어떤 꽃을 피우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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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입을 통하거든이
사랑이라는 그 이름,
어찌 그리 황홀히 노래 부르는가요 ?
사막 모래바람 한 가운데

시인의 머리 통하거든이
사랑이라는 그 이름,
어찌 그리 소담스레 열매 맺는가요 ?
거센 폭풍우 속일진대

시인의 눈을 통하거든이
사랑이라는 그 이름,
어찌 그리 따사로운 빛살 비추이나요 ?
어두운 밤중 분명커늘

시인의 손길 통하거든이
사랑이라는 그 이름,
어찌 그리 아리따운 꽃 피워내는가요 ?
거친 가시밭길 사이로

사랑에 목말랐던
사랑에 굶주렸던
사랑 갈급하였던
걸음걸음 마다 이어지는 인생길목,
시인의 발자국 닮아지고파

솟아나는 사랑과 보여지는 웃음,
시인은 그래서
사랑하는 법 쯤은 다 안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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