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네번째 가상詩集입니다.

2012년 봄부터 씌여진 詩들입니다.
實驗詩적인 성격의 習作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오늘까지 계속 이어져오는 역사의 章입니다.

처음 詩人의 길에 入門한 이래로
이제껏 40년 이상을 지어온 詩이지만 아직도
정확한 詩의 정의를 내리지 못한 채,

판도라의 상자를 가슴에 품어안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풍운아로 떠돌며
詩의 본질을 찾아 헤매고 있는
詩人 林森의 애환이 드러나 있습니다.

林森의 고행은 그래서
지금도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그의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쭈욱 ~~

詩人의 멍에를 天刑으로 걸머지고 있는 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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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달라 마리아의 환생 - 1 *



시작노트

" 막달라 마리아의 환생 - 1 " 詩作 note

환생이라는 단어는 실로 오묘하고 신비롭다. 가능성의 여부는 제쳐놓고, 그저 생각만으로도 가슴 뛰는 사건이다. 다시 태어난다? 아니면 다시 살아본다? 아무튼 변변치 못하고 비루먹은 현실을 탈피하여, 새롭게 삶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는 환상만으로도 너무나도 근사하고 황홀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꿈이며 공상이다. 어떻게 사람이 다시 태어날 수가 있다는 말인가?

한 술 더 떠서 사람이 아닌 다른 종족이나 생물체로 다시금 세상에 던져지는 목숨을 일컫는 거라면, 그건 또 우리가 어찌 알아차리고 환생이라는 형이상학적인 제목을 붙일 수 있단 말인가? 이야말로 터무니없는 망상이다. 도무지 현실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불가능의 사실에, 어째서 우리는 남몰래 가슴 뛰며 곧잘 상상의 날개를 펼치곤 하는 걸까? 그건 그만큼 힘겹고 험난한 현실의 삶에 대한 반발의식이 우리 무의식의 지저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버거운 삶으로부터의 탈피나, 일탈의 바람이 기왕지사 꿈에서 시작하고 이어가는 판타지라면, 그럴 바에야 조금 더 진행시켜서 아예 처음부터 다시 호흡을 시작하고자 하는 원념이 더욱 절실하게 우리를 시험하려 든다는 건, 어쩌면 비록 숨겨져 있지만 감추기 힘든, 당연한 주지의 사실이다. 사실 생각은 자유 아닌가? 우리가 언제 어디서 어떤 생각을 하던지, 다른 어느 누구도 간섭이나 방해를 할 수 없으니, 그건 본인에게 주어진 권리이며 특별히 허락된 자아다.

요는 그 생각이라는 실체의 범위가 어디까지이며, 실생활에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하느냐에 따라서 비현실적인 사람으로 변모할 우려도 있다는 점이다. 생각에 너무 집착하거나 몰입해 있다 보면, 애초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인간성의 변질,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성격변이자로 까지 될 소지가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우리의 생각이 정화되어있는 상태로 유지되고,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색상을 견지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 중에는 행동으로 옮겨야 할 꼭 필요한 생각들이 있는 반면에, 어쩌면 우리의 삶을 피폐하고 어둡게 만들 우려가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들도 존재한다. 우리는 그걸 잡념이라는 단어로 버무려 하찮게 취급한다. 해도 그만이고, 안해도 무방한 생각, 그것이 잡념의 범주다. 또는 필요하지도 않으면서 줄곧 우리의 곁을 맴도는 그림자같은 것, 그것이 잡념의 또 다른 얼굴이다.

어떤 일을 진행할 때 가장 경계해야 할 사항 중에 하나는 바로 잡념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시작하면서 마음을 다잡았다면 남은 것은 모든 열정을 쏟아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곧, 잡념을 다스리고 마음을 한 데 엮어서 손을 뻗어야 한다는 말이다. 보통은 잡념은 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본디 잡념을 긍정하는 경우는 없다. 애당초 긍정할 만한 마음이라면, 구태여 잡념이라는 호칭이 붙을 이유는 없다.

그래서 다스려야 하는 것이다. 마음대로 버릴 수도 없거니와 일반적으로 오해하는 바와 달리 딱히 버린다고 해서 좋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잡념은 무의미하고 쓸모없는 생각이라서, 분명히 언뜻 보기에는 아예 버리고 하나의 마음으로 일로정진함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잡념을 버린다는 건 오히려 스스로의 격을 낮추는 행위다. 허기사 일견 췌언처럼 들리는 말에 혹자는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다.

그간 인류의 역사를 지탱해온 수많은 위인들을 비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라도 애당초 사람인 이상 잡념을 버릴 수는 없다. 그 거추장스러운 것이야말로 지성의 증거이자 영성을 깨우친 자의 상징이기도 하다. 설명을 덧대자면, 우선 일반인들이 정의하는 개념부터가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는 전제를 알아야 한다. ‘정신일도하사불성’이나 ‘무아지경’이라는 용어 자체가 기실 잡념을 버린 상태를 표현하는 바는 아니다.

잡념은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돈하고 엮어내어 스스로의 바탕으로 삼는 일련의 진행이다. 원래 자아란 사고를 통해 확립하는 법이다. 잡스럽고 하찮은 생각이라도 궁극적으로는 자아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설령 침식조차 잊고 광적으로 몰두한다고 해도, 그 모든 상념을 버릴 수 있는 건 아니다. 그 일련의 공정과정을 연소시켜 어떤 결과의 기운을 일으킨다는 표현이 옳은 건지는 모르겠으나, 중요한 것은 연소시킨다는 사실이다.

뭐가 다르냐 싶겠지만, 이미 버려서 손에 쥐고 있지 않은 것은 불태울 수도 없는 법이다. 애초에 스스로 버린 상태는 아니지만, 잡념이 정말로 없는 존재를 우리는 쉽사리 알고 있다. 지성과 생각이 없는 가축들. 어떠한 잡념도 없이 맹목적인 생존과 번식에 몰두하는 하등의 동물들.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잡념이 존재할 수도 없는 짐승들을 두고 무아지경이니, 심력을 다한 기운을 소유한다거니 하고 표현하는 사람은 없다.

진실로 잡념을 모두 버린다면 하나같이 단순함과 영혼을 맞바꾼 짐승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인 이상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밥을 굶으면서 무언가에 몰두하던 사람도 얼마 안있어서 결국 배고픔을 떠올리게 되는 바, 그리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을 버렸다고 표현하기는 어렵다. 결국 사람들은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내달리는 격이랄까? 그렇기에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스린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장황한 설명이지만 결국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괜히 버리려고 애쓰지 말고, 확실하게 끝맺음 짓는 쪽이 좋다는 이야기다. 미련이 남지 않도록 조치하는 최선의 방책이 바로 이것이다. 그렇게 장벽을 넘으면 되는 것이다. 아니, 방법을 이미 깨달았다면 구태여 자신을 가로막던 장벽 정도는 공들여서 넘어가야 할 이유조차 없다. 길가에 널린 자갈을 구태여 넘어서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저 지나가면 그만인 것을.

오늘 고른 이 시는 성경을 통틀어서 가장 천대받고 외면받는 직업을 소유한 하층 부류의 한 사람인 ‘막달라 마리아’를 주인공으로 한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손가락질 받고 업신여김받는 창녀였지만 예수께서 택하여 구원의 반열에 동참시키고, 당신의 멧신저 역할을 하게 하신 그 여인은 실은, 우리의 삶에 깊숙하게 퍼져있는 우리의 본성과 근원적인 욕망을 대변한다. 누구도 감히 먼저 돌 들어 던질 수 없도록,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는 여인에게서 우리는 문득 서글픈 자화상을 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방황하며 갈 길을 찾아 헤매는 우리의 삶은 어차피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막연한 절대자의 힘을 갈구하는 믿음으로 점철되어 있다. 비단 종교적인 단정을 떠나서 우리의 나약한 본연에는 어딘가에, 또는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피난코저 하는 심리가 버릇처럼 각인되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쩌면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는 막연한 믿음이나, 남을 도와주면 그에 따른 보답이 반드시 주어질 거라는 피상적인 기대심리도 일종의 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우리에게 펼쳐져 있는 오늘이라는 이 날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견지해야 할 삶의 자세나 철학이 어떠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우리 삶의 질을 결정한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생각들의 모듬이 결국은 하루 삶의 분량이다. 비단 그것이 잡념으로 포장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 생각들 하나하나가 결국은 우리 삶에 쌓아가는 주춧돌이 되고 반석이 되어진다. 그래서 우리의 하루들은 그만큼 소중하고 귀하다.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보배다. 우리의 삶의 편린들은.

독립운동가인 ‘도산 안창호’ 선생의 일화다. 어느 날 청년들에게 강의를 한 뒤,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중에 한 청년이 한국엔 위대한 인물이 없다고 불평을 하며 말했다. “저는 우리나라에 시대를 이끌만한 지도자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루빨리 계몽되어서 민족을 이끌고 일깨울만한 지도자가 어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을 들은 안창호 선생은 정색하며 말했다. “자네는 정말 우리나라에 인물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자네를 비롯한 모든 청년들이 인물이 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네. 자네는 민족을 이끌만한 인물이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지금까지 무엇을 공부하고 있는가? 인물이 없음을 불평만 하고, 인물이 되려고 노력은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인물이 없다고 탄식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가 인물이 되려고 노력하게.”

소인(小人)은 탓을 남에게 던지고, 대인(大人)은 탓을 자기 안에서 찾는다고 한다. 삶을 살다 보면 불평, 불만할 상황이 많지만 그럴 때 남 탓만 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불평, 불만을 늘어놓으며 남 탓하기 전에 자기 자신이 그 상황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현명한 길이다. “당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바꾸어라. 그것을 바꿀 수 없다면 당신 마음을 바꾸어라. 불평하지 마라.” 라고 한 ‘마야 앤젤루’의 말을 기억하자. 바로 우리의 삶 가운데에는 우리가 찾아야 할 문제의 해답이 존재한다.

두 나무꾼이 있었다. 젊은 나무꾼은 마치 힘자랑이라도 하듯 쉬지 않고 나무를 베었고, 나이가 지긋한 나무꾼은 짬짬이 쉬면서 나무를 베었다. 저녁이 되자 베어 놓은 나무를 비교하던 젊은 나무꾼은 놀랐다. 당연히 자신의 나무가 많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노인의 나무가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젊은 나무꾼이 궁금하여 물었다. “분명 제가 어르신보다 쉬지 않고 열심히 나무를 베었는데 어떻게 더 많은 나무를 벨 수 있었습니까?”

그러자 노인이 대답했다. “자네는 오늘 하루 쉴 새 없이 도끼질을 했지만, 나는 잠시 쉴 때 마다 무뎌진 도끼날을 다시 세웠기 때문이라네.” 우리가 이미 익히 아는 이야기다.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려간다고 해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몸과 마음을 쉬면서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며 다듬는 것도 중요하다. 이제껏 무엇을 잘했는지, 잘못했는지 살펴보고 삶의 방향을 재설정하는 것... 이것이 무뎌진 도끼날을 세우는 것이며 세월을 아끼는 인생의 지혜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면, 주어진 시간을 활용하라. 거기에 황금 같은 기회가 있다.

그렇게 늘 준비하며 어떤 계기를 스스로 만들어 가는 지혜가 오늘을 사는 우리의 숙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1970년 ‘세계 역도 선수권 대회’를 앞두고 역도의 전성기를 맞았다.그런데 역도 선수들에겐 절대 넘지 못하는 벽이 존재했다. 그 어떤 선수도 500파운드, 약 227kg의 무게를 넘지 못했고, 사람들은 인간이 들어 올릴 수 없는 무게라고 불렀다.

대회 당일, 우승 후보였던 ‘바실리 알렉세예프’가 결승에 올랐다. 그는 자신 있게 외치며 역기를 들어 올리는 데 성공했지만 사람들의 입에선 아쉬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500파운드에 부담감을 느낀 알렉세예프 선수가 499파운드를 들어 올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장내에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주최 측의 실수로, 역기의 무게가 잘못 측정되었고 알렉세예프 선수가 힘들게 들어 올린 역기는 501.5파운드라고 정정한 것이다.

순식간에 장내에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드디어 인간의 한계가 깨진 것이다. 그리고 알렉세예프 선수 이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인간의 한계로 여겨졌던 500파운드를 들어 올린 사람이 그 해에만 6명이 나왔다. 이것이 바로 한계라는 단어의 무서운 힘이다. 알렉세예프 선수 이전에 500파운드를 들어 올린 사람이 없었던 이유는, 500파운드가 진짜 인간의 한계여서가 아니다. 그것이 한계라는 잘못된 믿음 때문에 사람들이 도전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땡벌이라고 불리는 땅벌은 큰 덩치에 비해 작은 날개를 가지고 있어 공기역학적으로 날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땅벌은 신기하게도 잘 날아다닌다. 자신의 한계를 날 수 없는 존재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날 수 있다고 강하게 믿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들판에 묶어놓은 소는 가느다란 밧줄로 묶어 놓아도 아예 벗어날 수 없다는 체념을 하고 있기 때문에, 엄청난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지레 포기하여 힘조차 쓰지 못하게 된다.

세상이 정한 한계는 없다. 그저 한계라고 믿는 자기 자신과 사람들만이 있을 뿐이다.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더욱 발전할 수도, 아니면 침몰할 수도 있다. 우리의 선택 여하에 따라서 비상이냐 추락이냐가 저절로 따라온다. 결국 우리의 유일한 한계는 우리 스스로 마음으로 설정한 것들이다. 참된 생각에서는 참된 행동이 나오고, 삿된 생각으로는 그릇된 결론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인지상정이다.

조선조 후기 때 문필가이며 시인인 ‘정수동’의 어릴 적 이야기다. 더운 여름날, 정수동은 서당에서 더위로 인해 졸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훈장이 불호령을 내리며 매를 들었다. 며칠 후, 정수동은 훈장이 졸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정수동은 훈장을 조용히 깨우며 물었다. “훈장님! 훈장님은 왜 주무십니까?” 그러자 멋쩍은 훈장이 둘러댔다. “나는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내 나이가 먹어 자꾸만 잊어버려서, 잊어버린 것을 물으러 잠시 공자님께 다녀왔다. 그것이 너에겐 자는 것으로 보였느냐?”

정수동은 순간 훈장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다음 날 정수동은 훈장이 보는 앞에서 자는 척했다. 또다시 잠자는 모습을 본 훈장은 큰 소리로 말했다. “수동이 이놈, 또 잠을 자는구나!” 훈장의 큰 소리에 정수동은 깨는 척하며 말했다. “훈장님! 저는 잠을 자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공자님을 뵈러 갔을 따름입니다.” 훈장은 내심 뜨끔해 하며 다시 물었다. “그래? 공자님이 네게 무슨 말씀을 하시더냐?” “네. 공자님께 어제 훈장님이 다녀가셨느냐고 물었더니 오신 적이 없다고 하시더군요.”

거짓말은 순간적인 위기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해서나, 혹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게 된다. 하지만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게 되어 눈덩이처럼 커진다. 순간적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말하고, 이해를 구하는 것이 현명하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새는 궁하면 아무거나 쪼아먹게 되며, 짐승은 궁하면 사람을 헤치게 되고, 사람은 궁하면 거짓말을 하게 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소크라테스’가 사는 마을에 남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아돌프’라는 청년이 있었다. 어느 날 소크라테스가 마을 앞 나무 밑에서 쉬고 있는데 아돌프가 휘파람을 불면서 나타났다. 소크라테스는 아돌프가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바람에 마을 사람 중에 상처를 받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고, 이 기회에 아돌프에게 가르침을 주고자 했다. 소크라테스를 본 아돌프가 먼저 다가와 인사를 하더니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 선생님! 제 말을 좀 들어보세요. 윗마을에 사는 ‘필립’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아세요? 그 착한 친구가 글쎄...” 이때 소크라테스는 아돌프의 말문을 가로막으면서 물었다. “먼저 이야기를 하기 전에 세 가지 체에 걸러보세. 첫 번째 체는 사실이라는 체라네. 자네가 지금 하려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증거가 확실하나?” 그러자 아돌프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도 들은 이야기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다시 아돌프에게 물었다. “그럼 다음으로, 두 번째 체는 선이라네. 자네가 하려는 이야기가 진실이 아니라면 최소한 좋은 내용인가?” 아돌프는 이번에도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별로 좋은 내용이 아닙니다.” 소크라테스는 이제 아돌프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이제 세 번째 체로 다시 한 번 걸러보세. 자네 이야기가 꼭 필요한 것인가?” 아돌프는 소크라테스의 말에 조용히 말했다.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소크라테스는 미소를 지으며 아돌프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사실인지 아닌지 확실한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니며 필요한 것도 아니면, 말해서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구약성서에 보면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있다’는 말이 있다. 혀는 작은 신체 기관이지만 때론 살인의 무기가 될 만큼 강력하다. 말 한 마디에 영웅을 만들기도, 바보를 만들기도 한다. 근거 없는 험담은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따라서 말을 하기에 앞서 늘 3가지 체에 걸러봐야 한다. 이 말이 사실인지, 상대에게 유익이 되는 좋은 내용인지, 꼭 필요한 이야기인지 걸러보는 것이다. 말을 할 때는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만 말하고, 들을 때는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을 배우도록 하자. 조선 중엽 ‘홍서봉’의 어머니 ‘유 씨’는 ‘어우야담’을 쓴 ‘유몽인’의 누이이자, 어깨너머로 글을 깨쳐 시문에도 능한 이른바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그녀는 직접 어린 아들을 가르쳤는데 아들이 이따금 학업을 게을리 하는 눈치가 보이면 엄하게 훈계하며 회초리를 들었다. “너는 불행하게도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다. 사람들은 아비 없이 자라면 버릇이 없다고 손가락질을 하기가 일쑤다. 나는 네가 그런 아들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고는 회초리를 비단보자기에 싸서 장롱 속에 간직하며 말했다.

“이 회초리는 장차 우리 집안의 흥망을 좌우할 것이다. 나는 이 회초리를 들면서 피눈물을 흘렸지만, 네가 커서 이걸 보면 이 어미를 고맙게 여길 것이다.” 부인은 또한 글을 가르칠 때마다 아들과의 사이에 병풍을 쳤다. 이를 본 마을 사람이 이상하게 여기자 이렇게 대답했다. “어미와 자식 사이는 아버지처럼 엄격할 수가 없는 법이오. 이 아이가 너무 영리해서 글을 잘 외는 것을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기쁨이 얼굴에 나타나게 된다오. 그래서 자칫하면 아이에게 교만과 자만심을 길러 주겠기에 내 얼굴을 못 보게 하는 것이라오.”

이런 비장하고도 엄한 어머니에게서 교육을 받은 홍서봉은 훗날 조선 중기의 문필에 뛰어난 문신이자, 영의정을 지내는 훌륭한 재상이 된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요즘 부모님들의 자녀교육 열정이 대단하다. 하지만 훈계 없는 교육은 지식을 가르칠 수는 있어도, 인성과 인품을 가르칠 수는 없다. 뛰어난 사람이기보다 따뜻한 사람으로 키워내는 것... 그것이 최고의 교육 아닐까? 교육은 원래 가정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으로 부모보다 더 자연스럽고 호적한 교육자는 없을 것이다.

겉모습에 의존하지 않고 혜안으로 사람을 느낄 수 있다면, 가슴으로 사람을 지킬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아름다움이 사라지거나 상대방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소멸되거나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사랑이라면 무한 세월이 흐른다 해도, 상대방이 곁에 없어도 변질되지는 않는다. 무지개 같은 환상의 아름다움과 노을빛의 숭고함이 깃든 세월의 언저리에서 꿈의 빛깔을 볼 때면, 순간적인 시력에 의존함이 아닌 영혼의 깊은 울림에서 그를 느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비탈진 세월의 양지에서도, 그 세월의 언덕 후미진 음지에서도 피어나는 서로 다른 아름다움이, 고운 인연이 자란다는 걸 알게 되는 날들 속에서, 우리가 간혹 역류하는 숱한 감정들을 어떻게 다스리며 살아가야 할까?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일이며, 행복하기 위해 가파르고 힘든 고개길을 넘어가는, 소위 만족을 향한 험난한 여정일 것이다.

작은 것에서 오는 마음으로 느끼고, 비워진 마음으로 헤아리는 아름다움이 있기에 늘 행복하게 느끼며 살아내는 게 아닐까? 또한 아주 작은 것에서 잔잔한 기쁨이나 고마움을 누릴 때, 마음 안에서 향기처럼 피어나는 행복이 진정 삶의 질이 달라지는 행복이 아닌가 싶다. 기나긴 인생길, 결승점에 일등으로 도달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억누르기 보다는 비록 조금 더디 갈지라도 힘들어하는 이의 손을 잡아당겨주며 함께 갈 수 있는 사람, 받은 것들을 기억하기 보다는 늘 못다 준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다.

오늘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기나 긴 잡념의 끝에 생성된 보석과 같은 생각, 그리고 우리의 삶을 더욱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만들어줄 찬란한 생각, 그것은 막연한 환생의 기대나, 다시 살아보고자 하는 비현실적은 망상에서 비롯되지는 않는다. 우리의 오늘, 이 앞에 펼쳐진 시간 시간들이 하나같이 소중하고 귀하며, 두 손안에 쏙 들어오는 이 행복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영원한 우리의 커다란 기쁨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시급하게 간직해야 할 출발점의 좌우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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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입혀진 목숨줄 하나 더 있어
고단한 인연 잇다가, 잇다가
차츰 퇴색되어지는
현란한 뇌세포 무리

나름 소중하고 애틋하여
당연스레 질 짐에 돌덩이 얹으니
비단 아름답지만은 않은
공동체의 연가 부르다

알량한 체면에 나서진 못하였고
손가락질 하지 않았음이,
돌 던지지 않았음이,
침 뱉지 아니하였음이,
도리의 다 라고 뻐겨 고개 세운

그래 -
저 여인의 골육에 켜켜이 쌓인
세월의 죄과 헤아릴 제
하늘만은 빼놓고,
나만큼 관대한 이 어디 또 있을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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