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네번째 가상詩集입니다.

2012년 봄부터 씌여진 詩들입니다.
實驗詩적인 성격의 習作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오늘까지 계속 이어져오는 역사의 章입니다.

처음 詩人의 길에 入門한 이래로
이제껏 40년 이상을 지어온 詩이지만 아직도
정확한 詩의 정의를 내리지 못한 채,

판도라의 상자를 가슴에 품어안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풍운아로 떠돌며
詩의 본질을 찾아 헤매고 있는
詩人 林森의 애환이 드러나 있습니다.

林森의 고행은 그래서
지금도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그의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쭈욱 ~~

詩人의 멍에를 天刑으로 걸머지고 있는 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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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이라는 배 *



시작노트

" 세월이라는 배 " 詩作 note

가슴이 먹먹하다.
사실상 그냥 먹먹하다는 표현 밖에는 달리 하고 싶은 말조차 없다.
사고에 즈음하여 희생자와 가족들을 향한 적당한 위로와 격려의 멧세지나 시를 좀 써줄 수 있겠느냐는 편집인의 부탁이 있었지만 애초에는 한사코 거절을 했었다.
도무지 이 상황에 덧붙여 어떤 글을 쓴다는 사실이, 뻔뻔하게 숨을 쉬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끄러운 필자의 양심으로 비추어볼 때 전혀 엄두가 나질 않아서였다.
그리고 한 편으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면서 아무런 글귀도 떠오르질 않는, 이른바 멘붕이라 할 수 있는 심리적 공황상태가 한참을 이어지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엄청난 사고를 그냥 무기력하게 지켜보면서, 공동의 책임을 져야 하는 어른의 입장에 서있는 필자가 아무 것도 시도할 수 없다는 사실로, 너무나도 큰 무력감과 자괴감에서 도저히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주저앉아 기도나 올리는 편이 필자가 선택할 최선의 방도일 듯 하여, 그저 애통한 마음을 담아 두 손을 모을 수 밖에 없었다.
평생 천직이라 여긴 글쓰기작업에서 이렇게 첫머리를 꺼내기가 어렵기도 처음인 것 같았다.
그렇게 의미없이 하루 하루 보낸 몇일 간의 낮밤들이었다.
그러다가 다시금 마음을 다잡아서 엄두를 내보기로 한다.
비록 미약한 바람이나마 하늘을 향해 간절하게 기원을 하고나서, 마지막 피 한 방울이라도 보태고 싶은 진실의 염원을 조심스레 담아보고 싶다.
필자가 할 줄 아는 게 이 것 밖에 없다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 참사로 너무나도 가슴이 아픈 모든 분들에게 감히 작은 위로와 격려의 멧세지라도 드리는 것이 글 쓰는 사람의 도리가 아닐까 하면서 시작노트를 시작해본다.
물론 순식간에 생때같은 가족을 잃어버린 분들에게 어떤 글이나 말일지라도 조금의 위로조차 될 수 없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주지의 사실이다.
단지 아깝고 고귀한 생명이건만 너무나도 허망하게 한 순간에 스러져간 희생자들이나, 구사일생으로 구조는 되었지만 엄청난 충격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피해자들에게 진솔한 사랑의 이 마음을 올리고 싶을 따름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사람 사는 세상에서 절대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 이렇게 버젓이 벌어지더니, 그것도 모자라서 사고 뒤의 책임전가나 잘잘못을 가리는 시시비비의 사연과 곡절들이 너무나도 장황하게 언론에 보도되면서, 온 나라가 분노와 원망과 비탄의 구렁텅이에 완전히 침몰되어버렸다.
이런저런 전후사정과 연락체계 등도 도마 위에 오르고, 인터넷이나 언론을 악용하는 개인 적 몰염치 행위도 도를 넘었다.
그런가 하면 정부의 대처방안이나 구호상황까지도 논란의 중심이 되고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어른이라는 것이, 대한민국을 가슴에 품고 살아온 국민이라는 것이 이토록 창피하고 모멸스러운 적이 또 있었던가 ?
그것도 이 참사가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천재지변이거나, 자연의 엄연한 대재앙이 원인이었다면 덜 억울했을 것이다.
순전히 몇몇 인간의 실수와 오판과 욕심에서 비롯된 사고가 이다지도 참혹하고 거대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더더욱 원통하고 안타깝고 분할 따름이다.
인면수심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래도 인간의 탈을 쓰고 살아왔다면, 적어도 짐승이 아닌 인간이라면 결코 해서는 안될 생각과 행동이 있다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기본적인 삶의 자세이며 동서고금을 막론한 불변의 진리이다.
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담보로 한다거나 직접 다루는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어차피 그에 상응하는 댓가가 평소의 급여나 지급되는 임금 등에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그네들에게는 일반적인 직업군에 비하여 위험수당이나 생명수당이라는 특별한 명목의 금액이 상대적으로 더 얹어지게 되어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는 유사시에 확실한 책임감을 갖고 임무에 임하라는 무언의 약속과 명령이 당연하게 함축되어 있고, 종사자들도 그 약조에 묵시적으로 동의를 하기 때문에 계약이 성사되고 업무가 진행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평소에 체계적인 시스템과 훈련으로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함이 마땅하며, 응당 사고가 발발하면 기계적으로 대처하여 피해를 최소화시켜야 하는 엄숙하고 막중한 의무가 자연스럽게 뒤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데 그 기초적인 사항이 지켜지지 못했다.
가장 근본적인 책무가 무시되었다.
내 목숨은 귀하고 다른 많은 사람들의 목숨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짐승보다도 못한 사람들에 의해서 이 인간 본연의 질서가 파괴되었다.
그리고 다시 진행되는 과정을 지켜보니, 지금 그 파괴자들이 별로 잘못한 건 없다고, 잘못이 있다면 일단 인정은 하겠지만 조금이라도 더 줄여보겠다는 취지로 갖가지 이유와 핑계를 동원하고 있다.
정말 눈을 뜨고 볼 수가 없는 목불인견이다.
법치국가에서 개인적인 증오와 법의 판단을 혼돈해서는 안되겠지만 정말 이번만은, 이 판결만은 필자가 직접 나서서 천벌의 결론을 내리고 싶은 심사 간절하다.

아무리 경황중일 망정 그래도 늘 하던 일인데 어떻게 그렇게 갈피를 못잡고 우왕좌왕하다가 대피시간을 놓칠 수가 있었을까?
조금만이라도 침착했더라면, 그들 중에 누군가 단 한 명만이라도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손해를 무릅쓰면서, 규정에 따른 지침하달이나 행동요령을 전파했더라도 정말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돌이켜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다.
영국 ‘링컨대학’의 ‘엘킨스’ 교수는 ‘하품하는 거북이’ 연구로 유명하다.
사람은 하품을 하는 사람 옆에 있으면 무의식 중에 저절로 하품을 따라 하게 되는데, 과연 지능이 낮은 거북이들도 사람처럼 하품을 하면 따라 하는가 하는 연구였다.
그래서 거북이 한 마리를 선택하여 한참동안 훈련을 시켰다.
처음에는 억지로 입을 벌리게 한 다음에 이어서 맛있는 먹이를 주기 시작하다가, 차츰 숙련이 진행되자 입을 벌리면 다음에 바로 먹이를 주는 방법으로 전환하였고, 나름 하품이라고 하는 현상을 보이고 나면 먹이를 주는 것이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인식되도록 하였다.
애초에는 거북이가 먹이와 연관되어 하품을 한다는 사실이 불가능해 보였지만, 결국에는 성공을 하였고, 훈련으로는 불가능이 없다는 사실에 교수는 환호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 단계였다.
다른 거북이들 앞에 이 숙련된 거북이를 데려다 놓고 하품할 때 마다 먹이를 주었다.
바라보는 다른 거북이들이 어떤 반응을 하는가 확인하기 위해서 자세하게 관찰을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시도를 반복해 봐도 다른 거북이들은 전혀 무관심이었다.
하품을 하거나 먹이를 주거나 다른 거북이들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인 듯 했다.
결론은 생각하는 지능지수가 낮은 개체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일정의 고등반응인 ‘지능공감대’가 유일하게 인간에게만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비단 무의식 중이라고 해도 공감대를 형성하는 생체반응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그래서 사회성으로 연결되는, 소위 인간다운 ‘뇌 반응’ 연구 결과였다.
그렇게 인간은 무의식중에라도, 평소에 관념적으로 숙지되어있는 습성이라면 밖으로 표출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니만큼, 부단한 노력과 연습이 거듭되어 있던 상황 대처라면 특별한 절차나 준비과정 없이도 순간적으로 실수 없이 이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참사에서 보여진 책임자들의 미숙한 행동이나 무책임한 처신들은, 어차피 아무런 사전 훈련이 안되어 있는 그들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보여지는, 전혀 새로울 것도 없는 이미 예고된 결과였다.
평소에 전혀 행동의 연습이나 의식의 깨우침 교육 같은 준비가 없었으니, 막상 어떤 급박한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체계적이고 일정한 방침이나 요령이 있을리 만무한 것이었다.

동물행동학자인 ‘콘라드 Z 로렌츠’ 박사가 했던 ‘회색 기러기의 부모가 되는 실험’을 보면 흥미로운 결과가 눈에 띈다.
부화기에서 부화한 새끼는 풍선이든 사람이든 자신이 처음으로 본, 움직이는 사물을 어미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부화기에서 알을 깨고 나온 회색기러기의 새끼들은 박사의 뒤를 어디든지 쫓아다녔다.
수영연습을 위해 호수에 데려가면 박사 곁에서 헤엄을 치며 머리 위에 앉기도 했다.
박사가 자전거를 타면 머리 위를 날며 따라가고, 새처럼 양 팔을 펼치면 내려왔다.
지나가는 진짜 새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성장하고 나서도 회색기러기의 착각은 계속되었다.
혹시나 하여 갈가마귀의 부모가 되었을 때도 결과는 같았으며, 성장한 까마귀는 애벌레를 잡아서 아빠의 귀에 넣어주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어릴 때 학습한 부모의 모습이 평생동안 변함 없이 뇌리에 박혀있는 것을 박사는 ‘인프린팅’이라고 명명했다.
이러한 ‘인프린팅’의 현상은 동물의 세계에서만 보여지는 실험 결과는 아니다.
일반적인 교육의 목적이 완벽하고 고착화된 어떤 지식의 일방적인 전달이 아니고, 창의적이며 주관적인 두뇌의 개발과 응용에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학습하고 체득하는 모든 경험과 결과치들은 스스로 ‘인프린팅’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지식의 세상으로 자신을 운용해나가는 지혜로운 인간성 습관화에 그 진정한 의의가 있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원숭이의 일상을 보면서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행태도 있다.
두 마리의 원숭이가 털고르기를 해주는 광경은 동물원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보기만 하여도 기분 좋아 보이는 그 행동에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다.
서로를 믿는다는 것을 전달하기 위한 애정 표현과 같은 것이다.
그 행위를 ‘글루밍 토크’라고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염분 섭취이다.
잘 보면 상대의 털을 헤쳐서 뭔가를 잡아 입에 넣는다.
그것은 결코 벼룩을 잡아먹는 것이 아니다.
애초부터 원숭이의 몸에는 벼룩이 거의 없다.
땀이 증발되고 난 후 피부의 표면에 남은 염분 덩어리를 먹고 있는 것이다.
원숭이는 비듬을 먹기도 한다.
비듬은 오래 된 피부의 각질층이 벗겨진 것으로 땀에 섞여있던 염분이 이곳에도 많이 포함되어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라거나, 섣불리 결론을 단정 짓는 편견과 오류 등이 때로는 심각한 과오와 착각일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이 갖고 있는 믿음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가 또한 쉽지 않다.
마치 원숭이들의 ‘글루밍 토크’가 벼룩을 잡아먹는 것이라고 여기면서, 그 사실을 아이들에게도 그대로 인지시키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는 사실만 보아도, 오류를 깨닫지 못하는 우매함이 간혹 우리의 생각과 선택을 붙잡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어차피 우리가 만들어놓은 기존의 진실이라는 이름이 과연 어떤 본질을 속성으로 갖고 있는지, 어떤 가면을 쓰고 실수와 오류를 감추고 있는지 우리는 이제 뒤돌아보아야 한다.
겸허하게 반성하고 엄중하게 채근하면서 잘못된 것은 과감하게 버리고, 스스로 뼈를 깎는 각오로 새로운 시작의 앞에 서야 한다.
가식과 거짓의 옷은 다 벗어버리고, 발가벗은 몸과 마음으로 새로운 진실과 대면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지금 이 나라를 온통 심리적 재해인 집단 트라우마의 망령에 사로잡히게 만든, 이제까지의 기성세대가 훈장인 양 가지고 있던 껍데기 뿐인 자만심과 성취감을 내려놓고 한 걸음씩 다시 걸어나가야 한다.
우리의 미래와 우리의 자식들에게 진정 부끄럽지 않은 세대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결코 치욕의 역사가 아닌 희망과 광명의 멧세지를 써내려가는 오늘의 이야기를 준비해야 한다.

패배와 절망의 연결고리나 실패와 실망의 연결고리는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늘 겪게 되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다.
패배와 절망을 겪고 난 후 기쁘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허나 그것들이 비록 기뻐해야 할 것은 아니어도 우리는 그것들에 때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알다시피 비오지 않은 후에는 찬란한 무지개가 뜨지 않고, 잎의 헌신 없이는 탐스러운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상원의원 선거에서 패배한 후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걷는 길은 언제나 험하고 미끄러웠다.
그래서 나는 자꾸만 미끄러져 길 밖으로 곤두박질치곤 했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기운을 차리고 내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길이 약간 미끄러울 뿐이지 낭떠러지는 아냐.”
일어서자.
우리의 숨이 붙어 있는 한 완전한 절망의 낭떠러지는 없다.
희망은 우리에게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가르치고, 반대급부로 절망은 우리에게 만사가 곤란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희망을 바라보자.
우리의 손에 펜이 한 자루 있다면 그것은 곧 희망이다.
그 펜으로 글을 쓸 수 있고, 그림을 그릴 수 있고, 편지도 쓸 수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의 입에 따뜻한 말 한마디가 담겨 있다면 그것은 희망이다.
그 말로 남을 위로할 수 있고, 격려할 수 있고, 기쁘게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의 발에 신발 한 켤레가 신겨져 있다면 그것은 희망이다.
그 발로 집으로 갈 수 있고, 일 터로 갈 수 있고, 여행도 떠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의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다면 그것은 희망이다.
그 눈물로 상실과 슬픔으로 지친 이들의 아픔을 씻어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의 귀에 작은 소리가 들려온다면 그것은 희망이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과, 아름다운 음악과, 자연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의 코가 향기를 맡는다면 그것은 희망이다.
은은한 꽃 향기와, 군침도는 음식 냄새와, 사랑하는 이의 체취를 느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의 곁에 좋은 친구 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희망이다.
그 친구에게 속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고, 지칠 때는 기댈 수 있고, 따뜻한 위로도 받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의 가슴에 사랑이 하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곧 희망이다.
사랑 그 자체 만으로도 우리 모두에게 희망의 메세지를 남겨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무진장하게 누리고 있으면서도 실로 무감각해져 있는 것들을 찾자.
다시 깨우쳐 보면 단 한 가지도 희망의 불씨가 아닌 것들이 없다.
불씨란 언제라도 지펴서 몸을 덥힐 화롯불을 만드는 희망의 서곡이다.
혼자가 아닌, 함께 하는 이들과 나눌 수 있는 풍요이다.
바라기에는, 정말 힘들겠지만, 이 모진 아픔과 슬픔을 다 잊고 예전처럼 숨을 쉬며 살아가기에는 차마 힘겹겠지만, 그래도 서로 서로의 슬픔과 아픔을 보듬고 감싸주면서, 또 하나의 희망을 작은 불씨처럼 지피는 우리의 다음날들이 되어지기를 절실하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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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치론 덧쌓인 햇살 온통 시름 머금어
파도에 부서지는 고혼 위로
하냥 흩젓게 흩젓다 흩젓고....

한 침 한 침 쪼개지고 갈라져
바늘되어 파고드니,
잡아늘린 혓바닥 기갈든 양 빼어문 채
털푸덕 주저앉은 저 하늘
무심하게 세월 가는데
원통한 심사로 종주먹만 들이댄다

게슴츠레 줄어든 빛그림자에
민망한 사지육신 한껏 감춰보아도
통곡의 눈물은 줄줄 흘러내리고,
지레 겁먹은 염통일랑
시르죽어 불콰한데 거기
차차리 내 숨을 불어줄 수 있다면

방울져 맺힌 한숨 나날이 걸죽하여
비몽사몽 천지간 혼미한 정신줄
선거운 눈 치켜뜰 제,
채 피지 못한 봉오리 헤아리며
속죄의 기도울림 간절하건만
소름돋는 팔뚝깜냥 찐득한 사연모듬

하많은 저 꽃들 과시 어이할꺼나?
불러도 대답없는 외침들 외침들,
허이연 물살 하릴없이 이글거려
포슬하니 입맛 다시더니
사람이라서 더욱 부끄러운 이 낯짝에
와랑와랑 소란스레 부서져오네

신이여!
차라리 나를, 우리를, 무책임한 어른들을
거두어갈 것이지
당신은 차마 양심도 없는가?
저 여리디 푸른 청춘들을 어쩌자고 -
신이시여, 신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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