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16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네번째 가상詩集입니다.

2012년 봄부터 씌여진 詩들입니다.
實驗詩적인 성격의 習作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오늘까지 계속 이어져오는 역사의 章입니다.

처음 詩人의 길에 入門한 이래로
이제껏 40년 이상을 지어온 詩이지만 아직도
정확한 詩의 정의를 내리지 못한 채,

판도라의 상자를 가슴에 품어안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풍운아로 떠돌며
詩의 본질을 찾아 헤매고 있는
詩人 林森의 애환이 드러나 있습니다.

林森의 고행은 그래서
지금도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그의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쭈욱 ~~

詩人의 멍에를 天刑으로 걸머지고 있는 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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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1년 뒤 *



시작노트

" 그리고 1년 뒤 " 詩作 note

보통 사람들의 사고방식에는 이해하지 못할 원칙이 있다. 부여된 똑같은 시간의 길이가 보는 관점에 따라서, 처해진 여건에 따라서 길게도 느껴지고, 때로는 지나치게 짧게 여겨지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세월의 흐름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예 중에서, 사람의 나이와 세월의 빠르기가 비례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젊어서는 그렇게도 안가던 세월이 황혼녘에 접어들면 갈피를 못잡을 정도로 빠르게 지나친다. 통상적인 이야기다.

그래서 나이 60이면 시속 60km의 속도로, 70이면 시속 70km의 속도로 점점 더 쏜살같이 빠르게 시간이 속도를 늘린다는 말이다. 필자의 세월은 지금 얼마쯤의 속도로 내닫고 있을까? 돌아보니 너무도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듯 하여 소름이 돋는다. 이렇게 세월이 무상할 정도로 빠른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촌음이라도 더 좀 아껴 쓸 걸, 왜 그리도 흥청망청 세월을 낭비하며 살아제꼈는지 돌아보는 과거에 후회만 한 아름이다.

1년 뒤의 삶을 예상하고 계획할 제면 제법 한참 뒤의 이야기인 걸로 여겨지지만, 이미 지나간 1년을 곱씹어보면 어찌 그리도 순식간에 지나쳐버렸는지 차라리 야속하기까지 한 것이 세월이다. 그렇다고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저 다시 이어지는 세월이나마 또 다른 후회의 그늘 속에 묻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무진 애를 쓸 따름이다. 허기사 그리 사는 것이 사람의 한 평생이라는 제목이다. 그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에게 해당되는 공평한 이치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1년 전으로 기준할 때, 꼭 1년 뒤의 시간이다. 1년 전에 시작한 시간이 바로 1년을 흐른 것이다. 그 1년 동안의 삶이 과연 길고 긴 일생 중에서 어떤 의미였는지, 얼마나 필요한 진실을 만들어낸 역사였는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한 페이지에 불과한 그 1년은 어차피 우리에게는 가버린 어제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또 하나의 1년을 만들어낸 기본 요소이며, 기초 재료일 뿐이다. 설사 조금 과오가 있었더라도, 실수가 좀 가미되었더라도 충분히 용서될 수 있는 흘러간 과거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부터 시작되는 또 하나의 1년이다. 1년이 흐른 뒤에, 오늘처럼 다시 푸념 섞인 과거 타령만 하고 있지 않으려면, 이제부터라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1년을 새로 시작하면 된다. 시작되는 1년을 위하여 우리는 계획된 목표와 지나간 경험들을 전부 모아서, 성실하고 충만한 삶의 이야기로 채워가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향했던 질타와 타박들을 다 거두어들이고, 반성과 단련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그렇게 거듭나는 자세로 우리의 1년을 시작할 출발선에 우리는 지금 서있는 거다.

이 시점에 가장 먼저 짚어보고 싶은 건 ‘우리가 갖고 있는 게 무엇인가’? 하는 질문의 답이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말고 오직 스스로의 가치와 요건을 똑바로 바라볼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하다. 어느 귀금속 가게에 추위로 발을 동동 구르며 안을 살펴보던 소녀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이 목걸이가 참 예쁘네요. 아저씨, 포장해 주시겠어요?” 당황한 가게 주인이 물었다. “그런데 누구에게 선물해 주려고 그러니?”

어린 소녀는 신이 나 이야기했다. “우리 언니에게요. 저는 부모님이 안계셔서 큰 언니가 엄마나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몇 년 동안 모은 용돈으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주고 싶었는데, 이 목걸이가 가장 맘에 들어요. 언니도 좋아할 거예요.” 가게 주인은 다시 물었다. “그렇구나. 그래 돈은 얼마나 있니?” 그러자 어린 소녀는 당당하게 말했다. “제 저금통을 털어서 전부 가지고 왔어요.” 그리고는 단단히 싸서 온 손수건을 풀더니 동전을 쏟아놓았다.

소녀는 목걸이 가격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가게 주인은 가격표를 슬그머니 떼고는 예쁘게 포장해 주었다. “네 이름이 어떻게 되니?” “은지라고 해요.” “그래, 집에 갈 때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해라.”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며칠 후, 크리스마스이브 날 저녁이 되었다. 한 젊은 아가씨가 가게 안으로 들어와서는 주인에게 목걸이를 내놓으며 말했다.

“혹시 이 목걸이를 판매한 가게가 맞으신가요?” “네, 저희 가게 물건입니다.” “죄송하지만, 누구에게 파셨는지 기억하시나요?” “물론이지요. 은지라는 어린 아이에게 팔았습니다.” “아! 그렇군요. 제 동생인데 그 아이에게는 그런 큰 돈이 없었을 텐데요.” “아니요. 누구도 지급할 수 없는 아주 많은 돈을 냈습니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냈거든요.”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싶은 마음, 그런 예쁜 마음을 알아보는 눈, 진실을 밝히는 용기, 오늘 우리가 한 따뜻한 일들이 행복한 재료가 되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데 더해진다면, 그것 만큼 보람된 일은 없을 것이다. ‘헬렌 켈러’는 이렇게 말했다. “가장 아름다운 세계는 언제나 상상을 통해 들어간다.” 의미를 잘 새겨볼 말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을 대할 때, 보여지는 겉모습으로 판단하고, 거기에 걸맞는 적절한 대응 방법을 생각하게 된다. 대인관계나 사회생활의 모든 처세의 근본이, 보여지는 모습으로 정해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긴다. 그러다 보니 예기치 않던 실수도 유발되고, 뜻 밖의 우를 범하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리고 앞으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작심한다. 그런데도 다시 똑같은 실수를 연발하게 된다. 왜일까?

옛날 어느 고을 원님이 백성들의 사는 모습을 보기 위해 나무꾼으로 변장하고 여기저기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부잣집 대문을 두드렸다. 원님은 대문이 열리자 말했다. “지나가는 나무꾼입니다. 목이 말라서 그런데 시원한 냉수 한 사발 얻어먹을 수 있겠습니까?” 부자 영감은 초라한 행색의 나무꾼을 보자 못마땅한 표정으로 하인에게 명령했다. “이 녀석이 목이 마르다는데 물을 바가지로 먹여주어라.”

하인은 영감이 시키는 대로 물을 바가지로 떠 와 나무꾼에게 들이부었다. 원님은 갑자기 당한 봉변에 당황하고 있는데 부자 영감이 다시 소리친다. “아직 목이 마른가 보구나. 한 바가지 더 안겨 주어라!” 하인은 물 한 바가지를 더 가지고 와 나무꾼에게 들이부었다. 동헌으로 돌아온 원님은 관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부잣집으로 향했다. 부자 영감은 원님을 보자 맨발로 달려 나와 귀하게 맞이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진수성찬을 차려 내왔다.

원님은 음식상 앞에 앉아 술과 음식을 자신의 옷에 들이부었다. 원님의 행동에 부자 영감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원님이 말했다. “이 술과 음식은 사람을 보고 차려온 것이 아니고 옷을 보고 차려온 것이니 당연히 옷이 먹어야 하지 않겠소?” 그 말에 놀란 부자 영감이 원님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니 얼마 전 찾아왔던 바로 그 나무꾼이었던 것이다. 깜짝 놀란 영감은 원님께 무릎을 꿇고 백 배 사죄하였다는 이야기다.

누구나 첫인상에서는 겉모습을 보게 된다. 그 사람의 외모, 재력 등을 먼저 보게 된다. 여기에 한 가지만 유념하면 된다. 바로 ‘성급한 판단’이다. 성급한 판단만 하지 않고 천천히 그 사람의 꾸미지 않은 내면의 모습을 살펴보는 식견을 갖는다면 사람을 잘못 보는 우는 범하지 않을 것이다. “첫인상에 좌우되지 마라. 거짓은 늘 앞서 오는 법이고, 진실은 뒤따르는 법이다.”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명언을 항상 가슴 깊이 새겨두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생각해야 할 사항은 바로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도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한 마디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힘겹고 난해한 가시밭길의 연속이다. 그 속에서 행하는 일들이 순탄하고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주어진 일이나 닥쳐온 운명 앞에서 포기나 좌절을 앞세운다면 결과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비록 힘에 부쳐 넘어지기 십상이고, 차라리 중단하는 것이 더 편할 거라는 생각이 넘쳐나더라도, 이를 극복하고 꿋꿋하게 앞을 향한 도전 정신을 가다듬는다면 필경 영광의 내일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 저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부모님의 이혼으로 고모네 집에서 자랐습니다. 그 후, 새엄마네 집으로 보내졌고, 9살 때까지 그곳에서 살다 중학교 3학년 때 쫓겨났습니다.

또다시 갈 곳이 없어진 저는 친척 집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친척들은 제가 나타나자 회의를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누가 쟤를 맡을 거냐?” 아무도 나서지 않자 보육원 이야기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아직도 그 말은 정말 큰 상처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던 중 여든이 넘은 할머니가 나서서 저를 맡으시기로 하셨습니다. 할머니는 노인연금만으로 생활하셨기 때문에 점심은 노인정에서 해결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노인정 공사로 문을 닫은 날이었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 불우이웃돕기 모금함에서 쌀을 가져왔는데, 집에 전기가 없어 밥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가까운 은행에서 따뜻한 물을 받아와 쌀을 불려 먹으면서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는 또다시 생계를 위해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턱이 부러졌는데 수술비가 200만원이나 나왔습니다.

제 전 재산은 50만원이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수술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수술비가 없는 것보다 더 서러운 건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병실에 홀로 누워있는 것이었습니다.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렸습니다. 전 병원에서 생각했습니다. 이러다가 할머니에게 끝까지 짐만 될 것 같았습니다. 퇴원하면 당장 공부를 하자고 그렇게 다짐했습니다.

어느 날, 노인정에 매일 오시던 할머니 친구분이 오시지 않아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댁으로 찾아가 보기로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할머니 안색이 안좋아 보였고 어깨는 퉁퉁 부어있었습니다. 병원에 모시고 가니까 뼈가 다 부러져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참았냐고 할머니께 여쭤보니 병원비가 너무도 많이 나올 것 같아 참았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때 다시 결심했습니다. 의대에 진학해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의사가 되기로 했습니다.

그 후, 막노동과 공부를 병행하는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하루 12시간 막노동이 끝나면 정말 10분도 앉아있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절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이렇게 살기는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처음에는 10분, 20분... 이렇게 시간을 늘려갔더니 나중엔 하루 6시간도 공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힘들어 수백 번 포기하고 싶었지만, 나 같은 사람도 성공할 수 있다는 걸 세상에 보여주고 싶어 그럴 때마다 더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하늘이 정말 존재한다면 도와줄 거라 굳게 믿었습니다. 그렇게 3년, 드디어 의대에 합격했습니다. 할머니께 제일 먼저 말씀드리니, 정말 기특해하셨습니다. 더 행복한 건, 저와 비슷한 처지의 학생들에게도 제 합격이 힘이 될 거란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앞으로 힘든 일이 더 많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전 이런 경험들에 항상 감사합니다.

한 겨울, 할머니를 모시고 노인정에 기대어 살았을 때, 쌀을 불려서 먹으며 끼니를 때울 때, 이런 모든 고생과 경험이 다 귀한 재산이 되어 지금의 저를 있게 했습니다. 덕분에 앞으로 저에게 더 힘든 일이 닥치는 경우라도 잘 살 수 있을 거란 자신감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열심히 그렇게 살 것입니다. 그리고 저처럼 벼랑 끝에 서 있을 누군가를 잡아줄 힘이 돼주고, 우리 할머니처럼 힘들고 어렵게 사시는 분들을 돕는 그런 멋진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

얼마 전 SNS를 통해 접한 의대생 ‘박진영’ 군의 고백이다. 우리 또한 살다 보면 크고 작은 어려움과 마주하게 된다. 피해 가는 사람도 있고, 맞서 싸우는 사람도 있다. 물론 여기에 옳고 그름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시련과 역경에 맞서 싸워 이긴다면 그 성취감과 행복은 억만금을 줘도 사지 못할, 값진 자산으로 남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폭풍이 부는 것은 너를 쓰러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네가 좀 더 강인해지도록 도와주기 위해서란다.” 작가 ‘조셉 m 마셜’의 ‘그래도 계속 가라’ 중에 나오는 글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남들이 아무리 시급하고 벅찬 상황에 직면해 있다 해도, 그보다 자신의 사소한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 어차피 세상은 본인을 중심으로 해서 돌아간다고 여기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니 자연히 모든 세상의 문제들보다는, 자신의 작은 한 가지 이유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좌우하는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를 제외한 모든 세상의 부분에서 많은 진실과 진리가 역사로 쌓여져 가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필자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또 하나의 사연을 소개한다. 그냥 흔한 남의 이야기라고 간주하지 말고, 누구의 가슴 속에나 존재하는 깊은 감성의 울림을 스스로 귀 기울이며 읽을 만 한 이야기다. - 내가 열두 살이 되던 이른 봄, 엄마는 나와 오빠를 남기고 하늘나라로 떠나셨습니다. 당시 중학생인 오빠와 초등학생인 나를 아빠에게 부탁한다며 떠나신 엄마. 남겨진 건 엄마에 대한 추억과 사진 한 장이 전부였습니다. 엄마는 사진 속에서 늘 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습니다. 아빠는 그렇게 엄마의 몫까지 채워가며 우리 남매를 길러야만 했습니다.

그게 힘겨워서였을까? 아니면 외로워서였을까? 내가 중학생이 되던 해 아빠는 새엄마를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엄마라고 부르라는 아빠의 말씀을 우리 남매는 따르지 않았습니다. 결국, 생전 처음 겪어보는 아빠의 매타작이 시작되었고, 오빠는 어색하게 “엄마!” 라고 겨우 목소리를 냈지만, 난 끝까지 엄마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아니 부를 수 없었습니다.

왠지 엄마라고 부르는 순간 돌아가신 진짜 엄마는 영영 우리 곁을 떠나버릴 것 같았기 때문에, 종아리가 회초리 자국으로 피멍이 들수록 난 입을 앙다물었습니다. 새엄마의 말림으로 인해 매타작은 끝이 났지만, 가슴엔 어느새 새엄마에 대한 적개심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새엄마를 더 미워하게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내 방에 있던 엄마 사진을 아빠가 버린다고 가져가버린 것입니다. 엄마 사진 때문에 내가 새엄마를 미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부터 새엄마에 대한 나의 반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기준으로 보면 새엄마는 분명 착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 타오르기 시작한 새엄마에 대한 적개심은 그 착함마저도 위선으로 보일 만큼 강렬해졌습니다. 난 언제나 새엄마의 존재를 부정하였습니다. 그 해 가을 소풍날이었습니다. 학교 근처 계곡으로 소풍을 갔지만, 도시락을 싸가지 않았습니다. 소풍이라고 집안 식구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점심시간이 되고 모두 점심을 먹을 때, 계곡 아래쪽을 서성이고 있는 내 눈에 저만치 새엄마가 들어왔습니다. 손에는 김밥 도시락이 들려있었습니다.

뒤늦게 저하고 같은 반 친구 엄마한테서 소풍이라는 소식을 듣고 도시락을 싸오신 모양이었습니다. 난 도시락을 건네받아 새엄마가 보는 앞에서 계곡 물에 쏟아버렸습니다. 뒤돌아 뛰어가다 돌아보니 새엄마는 손수건을 눈 아래 갖다 대고 있었습니다. 얼핏 눈에는 물기가 반짝였지만 난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렇게 증오와 미움 속에 중학 시절을 보내고 3학년이 거의 끝나갈 무렵 고입 진학상담을 해야 했습니다.

아빠와 새엄마는 담임선생님 말씀대로 인문고 진학을 원하셨지만, 난 산업체 학교를 고집하였습니다. 새엄마가 원하는 대로 하기 싫었고,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집을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다짐까지 했습니다. 결국, 내 고집대로 산업체 학교에 원서를 냈고 12월이 끝나갈 무렵 학교 기숙사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그날이 오고, 가방을 꾸리는데 새엄마가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더 모질게 결심했습니다. 정말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학교 기숙사에 도착해서도 보름이 넘도록 집에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학교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조금씩 적응이 되어 갈 무렵, 새삼스레 옷 가방을 정리하는데 트렁크 가방 아래 곱게 포장된 비닐봉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분명 누군가 가방 속에 넣어놓은 비닐봉지. 봉투 속에는 양말과 속옷 그리고 핑크빛 내복 한 벌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지런한 글씨체로 쓴 편지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편지지 안에는 아빠가 가져간 엄마 사진이 들어있었습니다. 새엄마는 아빠 몰래 사진을 편지지에 넣어 보낸 것이었습니다. 이제껏 독하게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습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되며 편지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동안 쌓였던 감정의 앙금이 눈물에 씻겨 내려가는 순간이었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 처음으로 그날 밤새도록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 후 처음으로 집을 찾아가게 된 날이었습니다.

난 아빠, 엄마, 그리고 새엄마의 내복을 준비했습니다. 그 날은 밤새 눈이 많이 내려 들판에 쌓여있었습니다. 멀리서 새엄마가... 아니 엄마가 나와서 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엄마 손에 들려있는 빗자루 뒤에는 훤하게 쓸린 눈길이 있었습니다. ‘엄마... 그동안 저 때문에 많이 속상하셨죠? 죄송해요. 이제부턴 이 내복처럼 따뜻하게 모실게요.’ 어색해 아무 말도 못 하고 속으로 웅얼거리는 모습을 본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따뜻한 두 팔로 날 감싸 안아주셨습니다.따뜻한 엄마의 품이었습니다. -

자신의 편견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알 기회 없이 스스로 차단하는 것은, 어두운 작은 방에 자신을 가두어 점점 외롭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살면서 어찌 미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하지만 한 번이라도 좋으니 오늘 먼저 상대방에게,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어보는 건 어떨까?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모습 속에 보이는 자신의 일부분을 미워하는 것이다.’ 라고 한 ‘헤르만 헤세’의 제언처럼 어차피 세상은 자신을 보는 거울이다.

거울 속에는 수많은 요지경 세상이 시시때때로 그 모습을 변화하며 자신의 삶을 그대로 투영한다. 그러면서 세월의 손을 잡고 내일로 나아간다. 우리가 생각하는 세월의 흐름은 실은 우리 자신이 만들어가는 삶의 기록이다. 1년이라는 시간이 길지도 짧지도 않고,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다는 사실은 이미 우리가 익히 아는 진리다. 단지 이 세월의 주체자가 우리 자신이라는 엄연한 진실 앞에서, 좀 더 성숙하지 못한 스스로에게 변명과 핑계를 대기 위한 방편이 바로 우리의 하소연이며 넉두리다.

그러나 필자는 단연코 예언한다. 우리의 1년 뒤에는, 우리의 1년 동안의 삶에서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우리의 흔적이, 우리의 그림자가, 우리를 그대로 복제한 거울 하나를 장만해서 우리의 뒤통수를 비추게 될 거라는 엄연한 사실을 발견하곤 통곡하게 될 지도 모른다. 이제 다시 시작하자. 비단 1년 짜리 삶일지언정 우선 한 번 잘 살아보자. 제대로 살아보자. 그리고 제법 괜찮게 살아낸 것 같은 자그마한 자신감이라도 붙잡게 된다면 다시 또 그렇게 살아가자. 그러면 되는 거다. 1년 씩, 1년 씩, 그렇게 걸어가자. 그렇게 살아가보자. 인생 뭐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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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에 찬 울타리 너머로
인간들 사모하는 발자국 소리,
잠잠히 외면하던 그 어느날
너는 기적처럼 소곤대며 다가섰다

고백컨대, 너 길러낸 비탄이
마즈막 여정의 동반자 삼아
내 몸뚱아리 숙주 삼을 제
나는 그만 부들부들 사정을 하고 있었다

사랑밖에 모르던 조급증은
펄떡이는 피주머니 쥐어짜며
그 순간 허겁지겁 투정부렸고,

손도끼 들고 설치던 궁금증은
덜렁이는 머리통을 감싸쥐며
그 찰나 우왕좌왕 부르짖었고,

끝도 없이 내닫던 답답증은
들썩이는 사지육신 옭아매며
그 때에 갈팡질팡 헤매돌았고,

절망 중의 절망으로
고통 중의 고통으로
방황 중의 방황으로
되새김질 하며 찌질찌질 흐른 밤과 낮의 교미,

그리고 1년 뒤

변한 건 아무 것도 없는데
모든 건 사라져버렸는데
퀭한 눈 앞으론 오직 그 길 하나만
선명하게 보여지거늘,

의식하기도 전에
기대하기도 전에
선택하기도 전에 진즉 예비된
내 가여운 숙명의 환희

그렇게 나는 여전한 세상의 왕따였으며
숙명여행 선발대
기꺼이 동참하고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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