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네번째 가상詩集입니다.

2012년 봄부터 씌여진 詩들입니다.
實驗詩적인 성격의 習作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오늘까지 계속 이어져오는 역사의 章입니다.

처음 詩人의 길에 入門한 이래로
이제껏 40년 이상을 지어온 詩이지만 아직도
정확한 詩의 정의를 내리지 못한 채,

판도라의 상자를 가슴에 품어안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풍운아로 떠돌며
詩의 본질을 찾아 헤매고 있는
詩人 林森의 애환이 드러나 있습니다.

林森의 고행은 그래서
지금도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그의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쭈욱 ~~

詩人의 멍에를 天刑으로 걸머지고 있는 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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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인 걸요 *



시작노트

" 봄인 걸요 " 詩作 note

답답한 콘크리트벽 사이로 회색빛만 만연한 도시의 공간 속에서도, 어느 골목 담너머로 슬며시 고개를 내민 살구꽃이나 복숭아꽃이 만발한 모습을, 거리 지나다보면 가끔 볼 수 있는 것이 요즈음의 풍경이다.
그럴 때면 한결같이 유년시절의 따사롭기만 하던 시골집과 고향마을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면서 생활의 굴레에 얽매이다가, 계절 감각조차 무디어져가는 현실의 자신이 투영되어 웬지 먹먹해지기도 한다.
그렇다, 지금은 매섭게도 차가웠던 겨울이 아니다.
산천초목이 생동하고 삼라만상이 약진하는 봄, 4월의 날들이다.
예전 고향에서는 이 때쯤이면 누가 심었는지는 모르지만, 집집마다 지붕 사이로 복숭아꽃 살구꽃이며 도처에서 자생하는 온갖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났었다.
그 가운데에서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며, 어린 아이가 보기에는 두려울 만큼 느껴졌던 거대한 고목의 느티나무가 새 잎을 틔웠었다.
그러면 또 거기로 어김없이 소쩍새가 날아들어, 전설에서의 어떤 장면처럼 “소쩍 소쩍쩍...” 하며 밤 새 피를 토하듯 구슬프게 울음 울곤 했다.
호기심일지 그리움일지 모르면서 뒤 쪽으로 난 쪽문을 살며시 열고, 서산 위 걸린 조각달빛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선 고목에 시선을 집중시키며 소름 돋았던 기억도 새롭다.
소쩍새 울음소리에 발맞추어, 고고한 자태로 달빛에 날개깃을 번쩍이며 푸드덕거리던 백로 한 쌍의 모습도 아직 생생하다.
예로부터 백로는 길조로 소중히 여겨져서 백로가 모여 사는 마을에는 매년 풍년이 들고 부자마을이 된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왔었다.
우리 고향마을에도 해마다 떼지어서 백로가 찾아들어 둥지를 틀곤 했었다.
그런데 그릇된 생각으로 마을사람들이 못살게 굴며 잘 보호하지 않자, 고개 너머 이웃마을로 모두 이사를 하고 단 한 쌍이 남아 느티나무를 지키고 있었던 정경 또한 눈에 선하다.
백로는 예컨대 고고하고 순결한 기상을 지닌 새로, 선비의 상징으로 일컬어졌었다.
한 발 쯤이나 되는 긴 목과 다리를 껑충거리면서도 우아한 품격을 잃지 않는 모양새, 보금자리를 찾되 청초한 솔밭에 안식처를 꾸미는 마치 학자와도 같은 품성을 지닌 새이다.

어린 시절의 추억담을 하나 회고해보자.
어느 여름날 오후, 여느 때처럼 산 너머 저수지로 미역을 감으러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갓 태어난 백로 한 마리가 그 때 물가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분명 농약에 오염된 몹쓸 음식을 먹고 괴로워하는 표정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애처로워서 즉시 그 백로를 안고 집으로 왔다.
그리고는 여리고 어린 그 새끼백로에게 정성을 쏟기 시작했다.
물고기를 잡아서 먹이로 주기도 하고, 집에 있는 낱알들을 뿌려주기도 하면서 한동안 주의깊게 보살펴주었다.
한 달 가량 지나자 어느 정도 덩치를 갖추고 건강도 제법 회복되면서 재롱까지 부렸다.
그리고 긴 장마가 계속되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보니 백로는 처마 끝에서 흠뻑 날개를 적시운 채 측은하게 서있었다.
백로가 다 자랄 때까지 보살펴주고 싶었지만 그 모습도 보기에 불쌍하고, 어른들의 성화에도 못이겨 제 갈 길로 보내주기로 하였다.
화창한 날을 골라 매어놓았던 다리를 풀어주자 백로는 창공을 향해 훨 훨 날았다.
어린 마음에도 친구를 떠나보내는 작별의 아쉬움에 가슴이 미어지면서 너무도 서운하였다.
그래도 탈 없이 잘 자라주어 건강한 모습으로 헤어질 수 있었으니 퍽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 후 세월이 엄청 많이 흘렀지만, 해마다 이 맘 때면 고향을 아련하게 연상하게 되면서 늘 함께 떠오르는 백로의 그 날갯짓이, 추억의 페이지에 지금도 선명하게 살아있다.
문득 창공을 향해 날아오르던 백로가 더없이 그리워진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파노라마에 괜스레 싱숭생숭해지는 심사라 야속하다.

필자는 이따금 집에서 멀지 않은 헌 책방엘 들른다.
꼭 어떤 책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다.
무심결에 한 주에 한두 번은 들르게 되는 주간행사라고나 할까 ?
그런데 마음에 드는 책을 도무지 고르지 못하던지, 값이 생각보다 좀 비싼 것 같으면 사질 못하고 그냥 나올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럴 때는 마치 하던 일을 하다 말고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영 개운치 못하다.
그래서 결국은 되돌아가 쌈 직한 다른 어느 책이라도 골라서 사가지고 나온다.
그렇다고 새 책방에를 전혀 안가는 건 아니지만, 헌 책방에서만 맛볼 수 있는 정말 정겹고 특별한 느낌이 거기에는 없다.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헌 책방의 가장 큰 매력은, 운 좋게도 절판이 된 귀한 책을 구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런 책들은 대개 낡고 지저분하며 누렇게 변색이 되어있기 마련이지만,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어떤 것에도 비길 수가 없다.
얼마 전에 가까운 지인으로부터 수필집과 시집 몇 권을 얻었다.
굉장히 오래된 책이라는 것만 알고는, 얼른 집으로 와서 떨리는 가슴으로 책들을 꺼냈다.
먼저 맨 뒷 장을 살그머니 열고 출판 년도를 확인했다.
그리곤 앞 쪽으로 되돌아와 첫 장을 열었다.
거기에선 그 책의 저자가 처음으로 출판된 자신의 작품집을 가슴에 보듬어안고, 두렵고도 떨리는 기쁨에 방망이질치던 심장의 고동소리가 들려난다.
그러면서 그 기쁨은 이내 필자의 것으로 옮겨지는 희열을 맛보게 된다.
이런 비밀한 환희를 누가 알아줄까 ?

그러나 헌 책방에서 늘 행복만 느끼는 건 아니다.
때로는 울적한 기분이 되어, 곧잘 시무룩해진 마음으로 나설 때도 있다.
누군가가 친필사인을 하여 증정한 책이 바로 헌 책방에 나와있는 걸 발견했을 때다.
마치 그 책이 필자의 책인 양 얼굴이 화끈거리고, 그렇게 방치해버린 누군가가 못내 원망스러워진다.
순간, 어디에선가 필자의 사인이 적힌 책도 헌 책방 한 켠에 덩그라니 놓여져있는 신세가 되어있을 것 같아 가슴이 뛰고 불안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어찌 생각하면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방 안의 책장 귀퉁이나 밑바닥에 처박혀져서 먼지 범벅의 천덕꾸러기로 방치되는 것 보다는, 그래도 이렇게 헌 책방에라도 보내져서 숨통이 트이고, 원하는 이에게 갈 수 있는 기회라도 주어진다면 훨씬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

헌 책방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다른 모든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들은 책방 가득한 갖가지 세상 냄새를 사랑하고, 거기 묻어있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거기 담겨있는 희노애락의 삶들을 사랑한다.
거기 실려있는 아픔, 슬픔, 고통은 곧 우리 삶의 맛이요, 냄새인 것을 그들은 안다.
대다수의 현대인들게는 무작정 새 것만을 중시하고 헌 것, 묵은 것을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되어있는 것 같아 때로는 서글프다.
물론 새 것이 좋긴 하겠지만 묵은 것은 당연히 좋지 못하다는 생각, 이른바 고물이라는 말로 표현해버리는 그런 실수를 이 시대의 우리들은 너무 쉽사리 저지르고 있는 것 같아 어떤 때는 정말 우울해진다.
세상의 어떤 역경이나 난관도 다 감싸줄 만큼 큰 가슴으로 우리를 품어주는, 그 옛날 어린 시절 자라난 고향의 정에 견줄만한 새 터전이 또 있을 수 있을까 ?
이 세상에 쪼그라들고 말라 붙어버린 어머니의 까만 젖꼭지 보다 더 그립고 소중한 가치를 지닌 아름다움이 있을까 ?
한낮에는 정신 못차리고 그저 즐겁게 뛰어놀던 아이들도 어둠이 오면 엄마가 있는 집으로 찾아들듯, 우리는 우리의 옛 것에 더 깊은 연민과 애정을 속내로는 느끼고 있으면서도 혹여 억지로 부정하려 드는 것은 아닐까 ?
허기사 버려지고 팽개쳐지는 것이 어찌 책 뿐이랴만, 당장에 소용되지 않는다고 해서 내다버리고, 필요하면 다시 쉽게 사오는 우리의 생활 모습들이 마치 어린 아이의 위험한 장난같이 느껴질 때면 저절로 기운이 빠진다.
우리의 삶은 어떤 면에서 한 권의 책과 비유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책일까 ?
새 책일 때도 사랑을 듬뿍 받다가, 오래 되어서도 외면당하지 않고 떨어져나가는 낱장들을 정성스레 붙이면서 두고 두고 읽힐 수 있는 사랑을 받는 책이 되고 싶은 소망이라면, 그것을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일까 ?
요사이 바쁜 일들이 겹쳐서 한동안 찾지 못했던 헌 책방을 내일은 꼭 들러야겠다.
어쩌면 생각지도 않게 반가운 책을 만나게 될 지도 모른다.
그 많은 책들 속에서 마음에 꼭 드는 귀한 책을 찾았을 때의 기쁨만큼, 필자의 삶 또한 그런 삶이 되도록 스스로를 가꾸고 싶다.

과연 어떤 삶이 진정 가치있고 진솔한 삶의 얼굴일까 ?
거창한 삶의 목표를 세워놓고는 그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온갖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하고 심혈을 기울여 각고의 노력을 쏟다가, 결국에는 달성여부와는 관계없이 누구나 똑같이 종말을 맞이해야 하는 것이 공평한 우리들의 삶이거늘, 대체 우리는 무엇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어떤 것을 성공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
필자가 참으로 존경하고 좋아하는 친구같은 선배님 한 분이 계시다.
그 분은 젊은 시절에 다방 DJ를 했다고 한다.
본인은 그 시절 아가씨들에게 겁나게 인기가 많았다고 하는데, 물론 그 말을 액면 그대로 전부 믿을 수는 없다.
객관적으로 볼 때 결코 잘생긴 얼굴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끔 DJ를 보면서 날렸던 멘트를 선배님은 당시 버전으로 우리에게 선보이곤 하신다.
입담이 워낙 좋은 분이라 우리는 늘 배를 잡고 웃는다.
목소리를 착~ 깔아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꽃은 피어도 소리가 없고, 사나이는 울어도 눈물이 없고, 사랑은 불타도 연기가 없습니다.
오늘 노래 나갑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러브 미 텐더입니다.”
그러면서 음악이 잔잔하게 흘러나오면 동네 아가씨들이 그냥 ‘꺼뻑’ 죽었다고 한다.
그것을 확인할 방법은 없다.
그랬다고 하니 그냥 믿어야 한다.
필자에게는 하늘같은 선배님이기 때문이다.
어제는 그 선배님과 대화를 하다가 굽은 소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거론되었다.
자식들을 좋은 대학에 진학시켜서, 큰 아들은 현재 미국에서 대학교수를 하고 있고, 작은 아들은 서울에서 대기업의 임원으로 있는데, 정작 그 어머니는 시골에서 혼자 쓸쓸히 지내고 계시다는 분의 얘기를 하던 중이었다.
그러다가 “자식을 아주 잘 키우면 국가의 자식이 되고, 그 다음으로 잘 키우면 장모의 자식이 되고, 적당히 잘 키우면 내 자식이 된다.”는 우스갯소리도 곁들여졌다.
그리고는 자식 중에 한 명 정도는 가까이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시켜서, 곁에 두고 살아야 한다는 말도 나오게 되었다.
“A bird in the hand is worth ten in a bush. [내 손 안의 새 한 마리가 숲 속의 열 마리만큼 값지다.]” 라고 말하면서 그 선배는 웃자고 하는 얘기라고 하였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틀린 얘기는 아닌 것 같았다.
그래야 집에 하수도가 막히면,
“얘야, 하수도가 막혔다. 얼른 와서 해결 좀 해라.”하고 편하게 부를 수 있고,
방안의 전구를 바꿀 때도,
“얘야, 얼른 와서 전구 좀 바꿔라.”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수도가 막혔다고, 전구가 나갔다고, 미국에 있는 아들을 부를 수는 없고 서울에 있는 아들을 부를 수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일 년에 겨우 한두 번 볼까 말까하는 아들이 내 아들이라고 할 수가 없고, 평생에 한두 번 볼 수 있으며 사진을 통해서나 겨우 만날 수 있는 손자들이 내 손자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겨울 추워져서야 소나무나 잣나무가 쉬이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는 글귀가 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나오는 말이다.
옛 어른들도 못난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가르치셨다.
무릎 꿇고 앉아 산을 지키는 못난 소나무, 그 못난 소나무가 결국에는 부모의 산소를 지키고, 선산을 지키고, 고향을 지키는 것이다.
같은 소나무지만 토질이 좋고 비바람을 덜 받아 곧고 수려하게 자란 소나무는 사람들이 재목으로 쓰기 위해 먼저 베어가버린다.
그리고 괴이하면서도 특이한 소나무는 분재용으로 송두리 째 뽑아가버린다.
그러나 같은 땅이라도 척박한 곳에 뿌리를 내린 못난 소나무는 모진 고생을 하면서 힘겹게 자라야 한다.
또 억지로 크게 자란다고 해도 동량이 되지 못하니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그 못난 소나무는 산에 남겨져 산을 지켜야 하는 운명이다.
그렇게 산을 지키는 못난 소나무는 산을 지키면서 씨를 뿌려 자손을 번성케 하고, 모진 재해에도 산이 훼손되지 않도록 산을 보존한다.
결국 잘난 소나무가 멋지게 자라서 재목이 될 수 있는 것도 못난 소나무가 산을 정성스럽게 지켜준 덕분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이 못난 소나무를 가볍게 보고 업신여기는 경향들이 없지 않다.
서로가 못난 소나무이면서도, 너는 나를 우습게 알고, 나는 너를 우습게 생각한다.
실상 지금까지 우리가 그렇게 살아온 것은 아닐까 ?
서로 힐난하고, 서로 깎아 내리고, 남 잘난 꼴은 못 보고, 그리고는 잘난 소나무만 선호하며 그를 우러러 본다.
우리 대부분이 못난 소나무인데 말이다.
우리 자식들 대부분도 사실은 못난 소나무가 될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못난 소나무가 우리에게 효도하고, 우리의 산소를 지키고, 우리의 고향을 지킬 것이다.
그래서 도시의 교육정책도 못난 소나무에게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잘난 소나무는 잘난 소나무대로 열심히 키워야 하겠지만, 평생 동안 고향을 지키게 될 못난 소나무들을 우리가 쉽게 생각하고 소외되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 말은 자식이 잘되면 고마운 일이지만, 자식이 평범하게 성장하더라도 구박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과도 상통한다.
오히려 더 정성스럽게 키워야 할 거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 아이가 결국은 내 곁에 오래남아 막힌 하수구를 뚫어주고, 전구를 바꿔주고, 내가 아프면 나를 업고 병원으로 달려갈 자식놈이기 때문이다.
못난 소나무도 함께 모이면 울창한 숲이 된다.
기왕이면 서로가 지지하고 응원하는 못난 소나무가 우리였으면 좋겠다.
그렇게 못났다는 실체를 인정하고, 못난 만큼 서로의 도움과 협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자신의 어줍쟎은 능력보다는 남이 베풀어주는 힘의 덕분으로 세상살이가 잘 이어질 수 있다는 진리를 인정하면서, 새로운 봄에 어울리는 소망과 사랑의 날들로 이 계절을 살아가는 우리였으면 참 좋겠다.
울창한 숲의 마음으로 세상을 감싸안는 고향처럼, 사랑을 나누면서 이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가 된다면 정녕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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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인 걸요.

밤 오면,
별비 시나브로 내려오는 동산에 오르세요.
온 밤이 흠씬 새도록
별들과 더불어
한마당 아우성하다가
별무덤에 죄다 묻어버리고
이윽히 내려오시면 되니까요.

밤 되면,
별강 오손도손 흘러가는 들길을 거니세요.
이 날이 온통 밝도록
별들과 어울려
한풀이 몸부림하다가
은하수에 모두 띄워보내고
넌지시 멈춰서시면 되니까요.

밤이면,
별빛 뭉게뭉게 비추이는 광야로 나서세요.
신 새벽 물컹 오도록
별들과 섞여서
한바탕 넋두리하다가
별똥별로 전부 던져버리고
홀연히 돌아오시면 되니까요.

밤에는,
별님 살그머니 속삭이는 벌판에 누우세요.
어둠이 하냥 깊도록
별들과 뒹굴며
한소절 하소연하다가
별무리로 듬뿍 흩어뿌리고
슬며시 일어나시면 되니까요.

봄이쟎아요, 지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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