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19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孤島의 默示錄... 토해낸넋두리前  


  "* 孤島의 默示錄... 토해낸넋두리前"
출판 예정 두번째 詩集의 제목입니다.

林森의 인생에 있어서 또다른 전환점이 되는 시기의 시작인
2008년 후반기부터 2010년 전반기까지
약 2년 정도의 기간 동안
마르지 않는 샘물인 양
정말 많은 量의 詩를 짓게 됩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역경의 나날을 헤쳐나오면서
量産된 詩이니만큼
어딘가 모르게 어둡고 비감어린 내용과
칙칙한 파스텔톤 색깔의 詩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시대의 방랑자 다운 林森의 詩心과
언어의 마술사로 불리우는 詩語의 조화가
오묘하게 조합을 이루고 있는지라,

독자들로 하여금 고개를 끄떡이게 만들고
한 데 어울려 함께 눈물짓는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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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구단 *



시작노트

" 구구단 " 詩作 note

볼수록 어렵고도 어려운 시다. 게다가 음습하고 어수선하기는 가히 으뜸이다. 도대체 필자는 왜 이따위를 시라고 짓고 있는 걸까? 좀 더 아름답고 고아한 시어를 골라서, 좀 더 착하고 멋드러진 심상으로, 좀 더 희망적이고 향기나는 시를 적을 수는 정녕 없는 건가? 그렇게라도 몸부림을 좀 하면 그럭저럭 고정 독자나 호의적인 팬을 더러는, 하다못해 여나믄이라도 확보할 소지는 있으련만. 그 가느다란 꿈마저도 스스로 짓밟고, 그저 허구헌 날 골방에 틀어박혀 퇴폐적이고 자학적인 시만 끄적거리고 있으니, 이건 스스로가 돌아봐도 대책 없는 헛짓거리다.

물경 마흔 다섯해 정도 시를 썼으니 이만 하면 이골이 날 지경은 된 터수인데, 아직도 그 간단하고도 쉬운 논리를 깨닫지 못하고 배냇병신인 양 고집스러운 시풍을 지속하고 있으니, 아마도 이승에서 개과천선하는 꼴 보기는 애저녁에 이미 글러버린 듯 하다. 그래서 이 지면을 통해서 극히 소수일 밖에 없는 독자 제위에게 고한다. 아니, 어쩌면 단 한 명도 귀 기울이는 이는 없을지 모르지만. 아무튼 각설하고, “림삼이라는 위인은 애시당초 남의 말은 전혀 안 듣고, 저 혼자만 잘난 맛으로 세상 험하게 살아오고(죽어가고) 있는 팔푼이니, 피곤하게 신경쓰지 말고 그저 그대로 살다 모진 삶 종치게, 냅둬요, 들!”

사실 고백하자면 이런 시를 짓는 필자도 즐겁고 행복한 것 만은 아니다. 어째서 시절 좋을 적에는, 일이 술술 잘 풀려서 기분이 최고조일 적에는 쥐꼬리만 한 시상조차 떠오르지 않다가, 심란하고 절망적이고, 세상을 향한 원망과 분노만 팽배할 때를 골라 어영부영 시를 적게 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당최 원치 않는 때와 장소를 구분치 못하고 막무가내로 퇴폐시를 양산하고 있는 필자의 그 알량한 머릿속이 궁금하기는 필자도 마찬가지다. 아니다. 아마도 이 세상 누구보다도 가장 처절하게 궁금하고, 가장 치열하게 궁금하다. 보라! 그래서 시방도 입꼬리 뒤틀리게 슬며시 서글픈 미소를 짓고 있는 중이다.

지인들과 대화하면서 강권한 적이 있다. 필자의 시를 단순하게 어렵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미안하지만 정신 집중해서 소리내어 세 번만 읽어 보시라고. 그렇게 조심스레 읽으면서 불쌍하고 가엽다는 배려의 마음으로 필자의 정신 세계를 조금씩 추측해보시라고. 그래도 잘 모르겠으면 뒀다가 다시 시도해보시라고. 그런 식으로 또 서너 차례 정도 반복하면 어렴풋이라도 이해하게 될 거라고. 참 나! 대관절 기본 꼴무새가 이러하니, 이렇게도 복잡하고 까다로우니, 바쁘고 긴박하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도대체 어느 누가 귀한 시간 쪼개어, 골 때리고 반사회적인 이까짓 팔푼이시 나부랭이를 읽으면서 억지 해석하려고 고뇌하길 고대한다는 말인가?

결론을 내리겠다. 그래서 도출해낸 결론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리고 단호하며 확실하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어쩔 수 없이 쭉 똑같은 결론이니 익히 알고 있던 바, “어차피 시를 지은 것도 나 혼자이고, 나 혼자라도 읽고 만족하니, 이만 하면 되었지. 독자는 나 하나면 족한다.” 이보다 화끈하고 속 시원한 결론이 또 어디 있겠나? 쓸쓸하지만, 비록 계속 필자는 고독하기만 하겠지만, 재발견한 결과를 받아들이면서, 현미경처럼 배율 높인 시야를 들이밀고 혼자 시를 적는다. 그리고 혼자 읽는다.

어차피 세상은 요지경이다. 세상은 난장판이며 야단법석의 실험장이다. 세상 사는 일은 그래서 고해를 헤치는 여정이며 돌고 도는 윤회의 구현이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일 보다는 지저분한 게 더 많고, 좋은 사람 보다는 나쁜 놈들이 훨씬 더 많이 산다. 세상에는 희망 보다는 절망이 더 흔하고, 사랑과 평화 보다는 배신과 증오가 잘 어울리는 세태만 만연한다. 그래서 세상은 천국 보다는 지옥에 가깝고, 소망의 내일이 도래한다기 보다는 절망의 과거가 반복되는 쓰레기장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라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이 현실에 사로잡혀 무능하게 삶을 방기해서는 안 된다. 과거로 회귀하는 퇴보의 길을 걸어서는 안 된다. 결코 불행과 낙담만 만연하는 건 아니니 소망을 잃지 말고, 힘겹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소신과 의지가 필요하다. 판에 박은 소리지만, 언제나 풍파는 전진하는 자의 벗이라는 생각으로 어떤 난관과 역경도 기꺼이 감내하며, 언젠가는 극복하고 말리라는 미래지향적인 사고방식으로 현실을 직시하는 긍정적인 마음 자세가 요구된다.

그래서 이 쯤에서 필자는 다시 말한다. 모든 복잡한 고민과 지치게 만드는 번뇌는 필자가 다 지고 갈테니, 그 모든 나쁜 요인들을 주저리 엮어서, 정녕 괴롭고 버거울 때마다, 도무지 돌파구가 보이지 않아 암담하고 캄캄한 오늘을 관통하며, 한 조각 시심으로 승화시키고, 한 줄 시로 소각시키는 애절함으로 세상을 향한 위로의 마음, 측은지심을 열심히 불지펴 시 지을테니, 그리하여 재수없는 시 적어서 민폐 끼친다 소외당하면서도, 필자 홀로 돌 맞고 피 흘리는 고행의 길을 기꺼이 걸어갈테니,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들 평안하시고, 그저 행복하기만 하시라. 어떤 고통이나 낙담할 일 전혀 없이 만사형통으로, 운수대통으로 언제나 한껏 웃음꽃만 피워가시라. 세상은 이미 알 듯, 아직은 그래도 살만 한 누리니까.

비록 조금은 미숙하고 여물지 못한 사람의 본성 때문에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다투기도 하면서 세상을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래도 서로 용서하고 양보하면서, 그렇게 조금은 부족한 걸 서로 채워주면서, 의지하면서 오순도순 살아가야 하는 게 현실의 숙제이며 처해진 운명의 자화상이다. 물론 용서라는 게 말처럼 그리 쉬운 문제는 아니다.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많이 참아주지만 남에게는 엄격하고 살벌한 잣대를 들이대서 판단하고 비판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내로남불’의 뻔한 진리를, 그 기준을 나에게만은 예외로 적용시키는 게 속성이다.

그렇지만 그렇다 해도 우리는 용서의 미덕을 배워야 한다. 어려운 만큼 소중하다는 걸 깨닫고 흠모해야 한다. 동경하면서 가슴 속에 고이 간직하며 보듬고 가꾸어나가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다. 그래야 사람다운 사람이다. 그래야 사람스럽게 사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목타게 그리워하며 함께, 다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용서라는 말을 믿지 않아요.”라고 대담하게 주장하는 작가 ‘김혜나’의 첫 번째 장편소설 ‘청귤’을 읽어보았다. “사실 저는 용서라는 말을 잘 안 믿어요. 그 단어 자체가 성립이 잘 안 된다고 생각해요. 누가 누굴 용서해요. 결국은 우리 다 똑같은 인간인데.” 섬찟한 말이다. 소름이 돋는다. 그리고 거울을 보는 것처럼 선명하다.

김혜나는 ‘작가의 말’의 첫 문단을 다음과 같이 썼다. “어린 시절, 나는 못생기고 뚱뚱한 아이였다. 어릴 때 앓은 뇌수막염의 후유증으로 나는 실제 사시이기까지 했다. 학교에 가면 아이들은 나를 돼지, 사팔뜨기라고 부르며 놀리고 괴롭혔다. 학교에 가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고, 당연히 공부도 잘하지 못했다.” 그래서 김혜나의 인물들은 그녀를 닮았다. 그들은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아팠던 순간을 끄집어내길 두려워하지 않는다. 꺼내놓고 보니 내 안에 있던 나쁜 감정들이 사라진 것 같았다고, 작가는 말했다. 그렇게 그녀는 개인적 경험을 녹여냈다. 그녀는 인물의 입을 빌려 “거짓말을 통해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는 그 어떤 이야기도 할 수가 없다.”고 말했지만, 그보다는 “나는 오로지 진실을 이야기해요.”라는 한 마디가 더 깊숙이 박혔다.

주인공인 소설가 지영에게는 친구 미영이 있다. ‘씨발’, ‘좆 같은’이라는 말들을 입에 달고 살아가는 그녀는 룸살롱 사장의 아내다. ‘선생님’이라 불리는 지영을 보며 미영은 생각한다. 자신은 예쁘지도 않고 맛있지도 않은 청귤 같고, 지영은 달고 부드러운 “진짜 귤” 같다고. 닮은 점보다 다른 구석이 더 많아 보이는 이들은 또 있다. 필리핀에서 온 여성 ‘로레나’와 가족이 된 ‘나’가 있고, 늘 왕따였던 ‘나’와 늘 사람들의 호감을 샀던 ‘리나’가 있다. 그들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밀어내기보다 호기심을 가지고, 호의를 보이고, 관계를 맺는다.

김혜나 작가는 “서로 다른 사람 속에서 나 자신을 찾아가는” 일에 대해 말했다. 타인을 바라보는 것이 곧 거울을 들여다보는 일이라고. 소설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그 누구도 자기 안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그시 응시하고 덤덤하게 이야기한다. 스님한테 요가 명상을 배운 적이 있었다. 그때 스님이 ‘자비’에 대해서 가르쳐주었다. ‘자’는 기쁨을 나누는 것이고 ‘비’는 슬픔을 나누는 거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궁극적으로 이 세계가 기쁨으로 가득차고 슬픔은 모두 소멸되는 것이 부처님의 ‘자비 명상법’이라고 말이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줄어든다는 게, 어떻게 보면 단순한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말을 잘 안 하면서 살아간다. 기쁜 일이 있어도 말 안 하고, 안 좋은 일 같은 건 더 숨기게 된다. 특히 가까운 가족들이나 친구들한테 말을 잘 못 한다. 그런 것들을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통스러운 이야기들을 더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자, 그러면 슬픔을 가진 사람들한테 위로가 되고 슬픔이 조금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도로 소설을 쓰게 됐다는 작가의 말이 긴 여운을 남긴다.

우리 몸에 힘이 있듯이 마음에도 힘이 있다. 우리 몸은 음식으로 힘을 얻지만 마음은 생각으로 힘을 얻는다. 좋은 생각은 마음의 힘이 된다. 사랑, 희망, 기쁨, 감사, 열정, 용기, 지혜, 정직, 용서... 등은 마음을 풍성하고 건강하게 한다. 하지만 미움, 거짓, 불평, 의심, 염려, 갈등, 후회... 등은 마음을 약하게 하고 황폐하게 한다. 물론 그 간단한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요는 알긴 알지만 행동은 어떻게 하느냐이다. 그렇게 스스로 맺는 결과가 바로 삶의 질과 수준을 결정짓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존 러스킨’은 “마음의 힘에서 아름다움이 태어나고, 사랑에서 연민이 태어난다.”고 했고 ‘스피노자’는 “평화란 싸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힘으로부터 생긴다.” 라고 했다. 우리 마음의 좋은 생각이 우리를 아름답게 하고 삶을 평화롭게 한다. 생각도 훈련이라는 건 아주 당연한 사실이다. 우리는 생각을 스스로 컨트럴하는 훈련을 해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생각도 습성이 되고 만다. 생각에 깊이 빠지다 보면 그 생각에서 헤어나오지를 못하게 된다. 나쁜 생각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

필자의 경우는 그럴 때면 스스로를 많이 껴안아주곤 한다. 어린아이를 껴안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자신만의 마인드컨트럴 같은 것이다. 마음은 표정을 만들고, 그 표정이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도 또, 나쁘게도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들은 모두 굉장한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으니 어찌 대단하지 않는가? 기왕이면 주변을 기쁘게 하는 데 그 능력을 한 번 사용해 보는 건 어떨까 하고 생각해본다. 아마도 스스로도 깜짝 놀랄만큼 우리가 갖고 있는 능력과 잠재력은 엄청나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이슬이 아침에 식물을 적셔주는 것과 같이 좋은 말을 해서 사람의 마음을 촉촉히 적셔준다면
좋은 말을 듣는 사람은 생명수를 공급 받는 것과 같을 것이다. 좋은 말은 소망이 있는 말이다. 내 생각이 아무리 옳을지라도 상대를 설득하려는 말과 책망하는 말은 때로는 소망을 끊을 수 있다. 사람은 모두 다르게 자기만의 은사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런데 내가 잘하는 것이 있다고 해서, 상대가 못하는 것을 책망하고 권면하면서 따라 하라고 할 때 상대는 죽어도 못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소망을 주는 말을 하자. 이슬과 같이 그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말을 하자. 소망을 주는 말은 진실되어야 한다. 한 마디의 말이라도, 아름다운 말을 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식물을 적셔주는 아침 이슬과도 같이 영롱하게 빛을 낼 것이다. 지금 상대의 눈동자를 한 번 들여다보자. 눈동자 안에 누가 있지 않는가? 상대방의 눈동자 안에 비친 자신의 모습, 그걸 ‘눈부처’라고 부른다. 서로의 눈부처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소중한 건지 모른다. 사실, 다른 사람의 눈을 빤히 바라보는 것만큼 어색한 것이 없다.

그렇게 바라보고 오랜 시간을 있어도 어색하지 않은 사람, 그리고 침묵이 불편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사람들은 침묵을 두려워한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그렇게 그 침묵 속에서도 편안할 수 있는, 서로에게 정말 소중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행복이란 만족한 삶이라고 했다. 자기가 만족할 수 있으면 무엇을 먹든, 무엇을 입든, 어떤 일을 하든 그건 행복한 삶이다. 우리의 불행은 결핍에 있기 보다 부족하다고 느끼는 결핍감에서 온다는 말이 있다. 그것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느끼는 상대적인 결핍감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첫째, 먹고 입고 살고 싶은 수준에서 조금 부족한 듯한 재산. 둘째,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 약간 부족한 용모. 셋째, 자신이 자만하고 있는 것에서 사람들이 절반 정도밖에 알아주지 않는 명예. 넷째, 겨루어서 한 사람에게는 이기고 두 사람에게 질 정도의 체력. 다섯째, 연설을 듣고도 청중의 절반은 손뼉을 치지 않는 말솜씨가 그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들은 완벽하고 만족할 만한 상태에 있는 것들이 아니다.

조금은 부족하고 모자란 상태다. 재산이든 외모든 명예든, 모자람이 없는 완벽한 상태에 있으면 바로 그것 때문에 근심과 불안과 긴장과 불행이 교차하는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적당히 모자란 가운데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나날의 삶 속에 행복이 있다고 ‘플라톤’은 생각했다. 우리는 잘 모르고 있다. 늘 없는 것,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행복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되, 만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 찾아온다. 행복은 물질적 풍요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만족할 줄 아는 마음에서 생긴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아야 할 것이다.

사랑과 꿈의 계절 봄이 무르익고 있다. 봄에는 모두 사랑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사랑할 것들이 눈에 많이 보이기 때문에 구태여 설명을 안 해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듯이 보아야 할 수 있는 것이며, 조건을 알아야 저절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사랑하다 보면 되돌려 받을 것이라 말하지만, 주지도 않은 것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 될 수 없으며 뇌물이나 거래를 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사랑하라고 쉽게 말을 하곤 한다.

사랑하고 싶은가? 그럼 먼저 내가 받은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눈을 감고 잠시만 생각해보자. 눈을 뜨고 보면 사랑할 것이 많지 않지만, 눈을 감고 영혼으로 세상을 보면 사랑할 것이 많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냥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위험 속에서 기적과도 같이 살아 있으며, 그 생명이 빛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살아서 숨을 쉰다는 것은. 모든 것을 누리며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미 지나간 자들이 무엇을 가지고 있나? 그들이 아무리 위대한 삶을 살았어도 지금 살아 있지 못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냥 흙덩어리에 불과한 것이다. 비교하는 눈은 사랑할 것이 별로 없지만, 비교하지 않는 영혼은 생명이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무한한 사랑의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이 계절 봄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생명이 있다는 단 한 가지의 조건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당장 자신부터 사랑하자. 그것이 습관이 되었다면 얼른 나서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자.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보이지 않는 것들 까지도 먼저 사랑을 하자.

세상에는 의외로 자신을 세워줄 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 순수한 회개의 과정이 아닌, 자신의 모습이 실망스럽다며, 자신의 모습만 한탄하는 일에 몰두하는 사람은 그 미래가 희망적이지 않다. 지금부터는 자신을 세워주고 칭찬해 주고, 자신을 일으켜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이기적인 것과 전혀 다른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통계적으로 자신을 좋게 보고 자신을 긍정적으로 내다보며 살아가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진로가 더 잘 열리고, 더 많은 사랑을 받으며, 더 많은 칭찬과 격려를 받는다.

자신을 메뚜기로 보는 사람, 자신을 쓰레기처럼 여기는 사람, 자신을 걸레처럼 여기는 사람, 자신을 못난이로 여기는 사람, 자신을 무능한 존재로 인정해버리는 사람, 이런 사람들 마음 속에는 항상 어두움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 자세에 머물러 있는 동안 인생을 믿음 안에서 성공적으로 이끌어가기는 불가능하다. 자신을 용서해 주는 사람, 자신을 격려해 주는 사람,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 자신을 세워주는 사람, 자신을 소중한 존재로 인정해 주는 사람은 그 미래가 희망적이다.

진정한 사랑은 삶 그 자체다. 사랑은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환상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환상은 언제나 삶을 멀리하게 하고 이성을 마비시키며, 현명한 사람들의 냉철한 정신을 흐리멍텅하게 만들어놓고 떠나가는 연기와 같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한 삶으로서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다. 삶이 고되고 힘겨울지라도, 그 자체로서 사랑을 받아들이고 함께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인간의 삶은 언제 어디서 어떠한 불행이 닥쳐올지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것은 서로가 어떤 삶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자세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 세상의 작은 것까지, 모두 아름다움의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는 세상이 아름답다고 노래한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사랑하고, 너무 많은 사람을 욕심내는 것 같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벅찬 일인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인생은 문제의 시작과 끝을 되풀이 하며 종착역에 이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의 골짜기를 지날 때도 험악한 바위틈에 피어오른 한 송이 꽃을 볼 수 있는 것이 삶의 비밀이기도 하다. 그리웠던 곳에서 보고 싶었던 사람을 마주보면 마음이 마냥 푸근해진다. 사람이 행복한 것은 그리운 곳과 보고 싶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내어줄 지 모르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이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함으로써 자신이 자신다울 수 있었다면 그 사랑은 참사랑일 것이다.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세상 살기가 힘겨운가? 세상에 의지할 데가 별로 없고 마음 붙일 사람이 곁에 없는가? 그래서 사랑을 하고 싶어도 사랑을 할 대상이 없다고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가? 하늘을 보자. 봄이다. 봄바람이 불고 있고, 봄햇살이 따스하게 내려다보고 있다. 우리의 마음 속에 봄을 심자. 잠자고 있는 봄을 깨우자. 잡념이 생기고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솟아나면 구구단이라도 한 번 외어보자. 입 속으로 슬며시 구구단을 암기하면서 앙금을 녹이고 찌꺼기를 배출하자. 그리고 다시 시작하자. 봄의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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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잠깐,
이미 녹슬고 퇴화한 날개 슬며시 파닥거려보자

그러나, 그건 하마 날개 아니라
실핏줄로 단단히 굳어버린 화석
그러나, 애초 그럴 줄 알았기에
절망도 하쟎는다
다만, 미칠듯 짜증날 뿐

그러나, 이젠 치미는 짜증도
왁살스런 세상의 채근과 돌아치는 세월 때문
시나브로 스러진다

그건 절망이야, 지쳐버린 절망이라구
차라리
자신 세상 향해 날아간 자에 대한 경외
묵념처럼 기리면서
구구단이라도 외는 게
별 보며 눈물씹는 누리에선
아주 잘 어울릴테지

어금지금한 처지에
서로 잘났다 우길 건 뭐 있냐?
혼자 앉아 씹는 고독은
헤어질 때 흘리는 눈물맛 나고,
조갈난 사람같이
진저리치듯 몸 떨며
단숨에 읊어대는 구구단은
심금에 와 닿는 어떤 위트와
다정한 멜랑콜리 담고있는데,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의 내면은
코끼리보다 훨씬 큰 것이고,
인간은 결국 서로의 일부 더듬는 소경일 뿐,
그러면서 서로 다 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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